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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2 18:26:52 조회 : 504         
한 장로님과 안동 최초의 감리교회​ 이름 : 김승학   

한 장로님과 안동 최초의 감리교회​

 

   얼마 전 의성감리교회를 시무하는 조창희 목사님이 교회를 찾았습니다. 그는 경북 의성군에 최초로 감리교회를 개척한 주의 종입니다. 또한 조 목사님은 저명한 아동문학가입니다. 2007년 목사로는 최초로 동요부분 한국아동문학작가상을 수상(受賞)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부친과 함께 안동교회에 다닌 적이 있습니다. 어릴 적 그의 친구들 중에는 안동교회 장로님으로 봉사하고 있는 분들이 여럿 있습니다. 가끔 그는 안동교회를 찾습니다. 또한 김광현 원로목사님이 하늘나라로 가셨을 때에는 조시(弔詩)를 지어 교회에 전달한 적도 있을 정도로 모(母) 교회와 다름없는 안동교회와 성도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갖고 계신 목사임입니다. 안동교회 80년사를 통해 조 목사님의 부친인 조상국 장로님을 익히 알고 있던 저는 조 장로님에 관해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 목사님을 만날 때마다 안동교회 80년사에 기록된 조상국 장로님에 관한 내용 이외의 일들에 관해 그에게 묻고 또 물었습니다.  

 

   우선 조상국 장로님이 안동에 내려오시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조 장로님은 서울 감리교신학교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실 뼛속까지 감리교인이었습니다. 그러던 그는 강원도 철원에 있는 일본 사람이 운영하는 금융조합에서 근무했습니다. 당시 금융조합은 현재 농협의 전신(前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조 장로님의 누님 두 분이 미리 안동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 중의 한 분은 후에 안동에서 첫 외과병원을 개업한 백태성 원장의 부인입니다. 즉 백태성 원장과 조상국 장로님은 처남·매부 지간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조 장로님의 아들인 조창희 목사님은 징용문제가 있었는지 선친(先親) 조 장로님이 철원을 떠나 해방 바로 전(前) 해인 1944년, 안동으로 내려와 생활하게 되었다고 기억합니다. 당시 안동에는 백태성 원장이 안동 최초의 외과병원인 백병원을 개업하여 성황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런 관계로 안동에 오게 된 조 장로님은 금융조합에서 근무한 경력으로 이 병원의 회계 업무를 통괄하는 서무과장으로 새롭게 일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백병원의 원장인 백태성씨는 서울 세브란스 병원 외과의사로 근무하던 1932년, 안동성소병원 부원장으로 부임하였습니다. 백태성씨는 비록 부원장이었지만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성소병원 원장의 직무를 보는 형편이었다고 합니다. 1943년 미일전쟁이 발발하자 만행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한 일제는 선교사들을 강제로 추방시키고 기독교 병원을 폐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일제의 방침에 따라 안동성소병원도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이 때 안동교회 담임인 김광현 목사님은 백태성씨에게 안동교회 안에 있는 건물을 병원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제안을 했고, 백태성씨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백병원 간판으로 안동 최초의 외과병원을 개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백병원은 안동 독립운동의 비밀 아지트와 같았습니다. 백병원의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우리 안동교회 은퇴 장로인 고 이주헌 장로님은 극비리에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상국 장로님도 일본인 형사가 불시에 병원에 나타나면 불안한 마음으로 애간장을 졸였다고 합니다. 이주헌 장로님으로부터 이 사실을 듣고 조상국 장로님은 백태성 원장에게 낙동강 철도 둑길을 걸으면서 전했을 때, 백태성 원장은 비록 자신이 공개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지 못하지만 이 선생(이주헌 장로님)을 밀어주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백태성 원장과 조상국 장로님은 백병원이 독립운동의 아지트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 가운데 비밀을 지키며 조용히 동참했던 것입니다.  

 

   해방이 되면서 안동교회는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해방 전 안동 읍에 있던 교회들은 안동교회로 통폐합되었습니다. 1946년 당시 집사인 조상국 장로님은 안동교회 유년부장으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1959년 10월 3일(토) 오전 10시에 있었던 안동교회 창립 제50주년 기념예배 시 35주년 근속 시상에서 김광현 목사님의 발언을 통해 그동안 숨겨진 조상국 장로님의 이 비화가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조 장로님의 아들인 조창희 목사님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조상국 장로님 잘 오셨습니다. 그 때 6·25 전쟁으로 초등학생 출석 1,000명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주일예배에 초등학생 1,000명 출석하지 못했지만 이제 다시 1,000명 초등학생 출석 시대를 열어갑시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한 주일(主日) 전인 1950년 6월 18일, 초등학생들이 무려 998명이 참석하는 놀라운 일이 있었음을 김광현 목사님은 이 시간 기념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알린 것입니다. 다음 주일이면 드디어 1,000명을 돌파할 것으로 모두가 기대하며 기도하고 있었지만, 6월 25일 주일에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에 모두 혼비백산하여 교회에 나오지 않아 계수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강원도 동부, 충북의 피난민들이 안동으로 밀려왔는데, 이들은 대부분 감리교회 교인들이었습니다. 당시 안동교회는 노회나 도사경회를 위해 해방 후 6칸 겹집으로 지은 기숙사와 교회 아래층과 4개 교실 크기의 유치원이 있어서 이들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안동도 소개령이 내려져 시민들과 피난민 모두는 안동을 떠나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복이 되었다가 1·4후퇴로 다시 37도선 이북이 소개되자 단양 이북(以北)에 살던 사람들이 피난해야 될 처지가 되자 전에 안동으로 피난 왔던 교인들이 곧바로 안동교회로 찾아왔습니다. 이들은 단양감리교회를 섬기던 서영준 담임목사님과 교인들이었습니다. 6·25 전쟁 이전에 존재했던 안동교회 경내의 기숙사와 유치원 건물이 전쟁으로 파괴되어 이들은 우선 안동교회 예배당 1층에 머물게 됩니다.  

 

   당시 감리교회는 장로교회와 달리 오늘의 총회 본부와 같은 총리원으로 부터 재정적 도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자 혼란한 상황 속에서 총리원의 도움을 받지 못해 서 목사님의 살림살이가 어려웠습니다. 서영준 목사님의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담임 김광현 목사님은 서 목사님께 학생예배 설교를 부탁도 하고 사례비를 드렸습니다. 또한 이부자리와 생활비를 보조했습니다. 그러다가 안동교회는 여러 가지로 어렵고 힘든 서 목사님을 교파를 초월하여 전도목사로 청빙하기로 결정하고 월 사례비는 4만원으로 책정했는데, 사례비는 남·여전도회에서 부담하고, 부족하면 교회 예산에서 지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노회 경내의 교회 중에는 장로교회가 타교파인 감리교 목사를 전도목사로 결정하고 돕는다고 뒷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단양감리교회 교인들은 교회 1층에 기거하다가 겨울이 되어 추워지자 방을 얻어 나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것이 안동에 감리교회가 세워지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안동에 감리교회가 없었는데, 김광현 목사님은 이번 기회에 안동에 감리교회를 세우자고 서 목사님께 권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 목사님은 안동에 감리교회를 시작하는 것에 부정적인 의사를 표했습니다. 당연히 피난을 끝내고 고향 땅인 단양으로 돌아 갈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김광현 목사님은 피난민으로 있기 보다는 감리교회 교인이 났지 않냐고 권면했을 때 서 목사님의 마음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서울에서 부산으로 총리원(감독 유형기 목사)이 이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산으로 내려간 서 목사님은 안동장로교회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와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지 모르니 안동에 감리교회를 설립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의사를 전했다고 합니다. 장로교의 재정적 도움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총리원은 서 목사님에게 약간의 생활비와 교회 설립을 위한 재정적인 도움을 줄 것을 약속했다고 합니다.  

 

   결국 감리교 총리원은 서 목사님의 사례비를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총리원은 감리교회의 건축 비용을 지원했습니다. 이 때 안동교회 조흥로 장로님은 예배당으로 사용할 옥정동 적산 가옥을 인수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 가옥을 수리하고 예배당과 교육자 사택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1951년 4월 29일에 설립된 안동시 옥정동 464-9번지에 소재한 안동제일감리교회의 시작입니다. 이 교회가 바로 안동의료원 동편 옆에 안동제일감리교회입니다. 특히 안동에 처음으로 감리교회가 설립될 때 안동교회는 조상국 장로님을 보내 교회 설립에 기여하게 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상국 장로님은 감리교회 출신이었지만 안동으로 이사 왔을 때 안동에는 감리교회가 없어 장로교회인 안동교회에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김광현 목사님은 조 장로님이 감리교 출신이기 때문에 안동에 세워진 감리교회로 갈 것을 강력하게 권유했습니다. 모두 피난민뿐이므로 이미 안동에서 자리 잡아 생활하고 있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 조 장로님은 사양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저녁예배를 마칠 때 즈음, 감광현 목사님은 조상국 장로님(당시 집사님)과 그의 부인인 장민성 집사님을 교인 앞에 세워놓고 “이제 안동에 감리교회가 세워졌으니 뿌리를 찾아 가야되지 않겠느냐”고 하시면서 “선교사로 파송하는 순서를 가지겠다”고 폭탄선언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자리에서 특별헌금과 건축헌금 순서를 갖고 유기대야를 선물로 전달했다고 합니다. 이 유기(鍮器) 대야는 김신정 권사님(권오두 장로님의 부인)의 부친인 김순복 장로님이 운영하던 유기공장에서 만들어 파는 것이었습니다. 조상국 장로님의 장남인 조창희 목사님은 아직도 이 유기대야를 기념으로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참고로 장민성 집사님은 1948년에 개교한 안동최초의 유치원인 안동유치원의 최초의 보모(保姆)로 일한 재원(才媛)이었습니다. 이처럼 안동교회는 자신의 교회만을 생각하는 이기적(利己的) 교회가 아니라 안동 땅 전체의 복음화를 위해 어떤 희생도 할 수 있다는 이타적(利他的) 교회였습니다. 안동교회는 유년주일학교의 최고의 적임자인 조상국 장로님을 새로 세워진 안동제일감리교회에 아낌없이 파송할 수 있는 리더십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더욱이 이제 첫발을 시작한 안동유치원에 꼭 필요한 재원을 새로 시작하는 약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떠나보낼 수 있는 교회가 바로 안동교회였습니다.  

 

   결국 김광현 목사님의 뜻에 순종하며 제일감리교회로 이명한 조상국 장로님은 그 후 이 감리교회의 초대 장로가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안동에 정착하지 못한 교인들 중에는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기도 했지만 교회는 점점 부흥하여 몇 해 후에는 조상국 집사님이 장로로 임직 받을 정도로 제법 규모를 갖춘 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자 처음 사용하던 예배당을 철거하고 건축하자는 의견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조상국 장로님이 예배처소 뒤쪽을 확장하자고 제안함으로 감리교회가 안동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린 역사적인 장소가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조 장로님은 당시 교인들과는 달리 일찍부터 역사의식을 갖고 계신 분이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1974년 화재(火災)로 교회가 전소(全燒)되었습니다. 복구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 때 안동교회는 제일감리교회를 도와 다시 세우는데 협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안동교회는 1974년 4월 28일 주일, 전교인이 감리교회 건축을 위해 헌금하고 그것을 전달한 바 있습니다. 이때도 경안노회 경내의 일부 교회는 타교파 교회를 재정적으로 돕는다고 비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주의 몸이고, 비록 교파가 다른 교회라 하더라도 연약한 그리스도의 몸은 반드시 든든히 세워져야 하기 때문에 안동교회는 안동제일감리교회를 힘에 겹도록 도왔던 것입니다.  

 

   안동교회가 감리교회 건축에 기여한 사실을 알게 된 당시 감리교 총리원의 류형기 감독은 안동을 방문하여 고마움을 표시하고 감리교 총리원에서 표창하려고 했지만 김광현 목사님은 극구 사양했다고 합니다. “장로교회가 안동에서 전도한 지 40년이 넘었는데, 아직 안동 교세가 미미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로교회 혼자서 못 해내는 일을 감리교회가 같이 하게 되었으니 감사는 우리가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표창하는 대신 안동제일감리교회를 힘껏 도와 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1909년 8월 8일, 첫 주일에 태동한 안동교회는 10여 년이 지난 1924년 안기교회를 분립(分立)했으며, 이후 8년이 지난 1932년 두 번째로 신세교회를 분립했습니다. 안동교회는 지난 100여 년 동안 20개 교회를 분립하고 개척했습니다. 이유는 김광현 목사님 말씀처럼 안동의 복음화는 안동교회의 독점(獨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 마을에 더 많은 교회가 세워져 영혼을 구원하는 거룩한 사역에 모든 교회가 어깨동무하며 합력할 때 안동 땅에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속히 올 수 있음을 안동교회와 당시 담임인 김광현 목사님은 깊이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6·25 전쟁은 안동 땅에 감리교회가 처음으로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삶과 신앙의 근거지를 떠나 안동으로 피난 내려온 단양감리교회 교인들은 고난 속에서 어렵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처참한 패배로 여겨진 상황이 오히려 안동에 감리교회가 설립되는 결정적인 승리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로만 설명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개입(介入) 없이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전쟁, 피난, 안동 도착, 안동교회에서의 거처, 김광현 목사님의 넓은 마음, 조상국 장로님의 순종과 하나님의 간섭(干涉) 등을 통해 안동에 최초의 감리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가 ‘모함으로 사는 인생’에서 쓴 것처럼 “믿음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승리, 특히 예기치 못한 승리는 신(神)적 개입에 의한 것이다”는 말에 무조건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2018년 5월 31일

김승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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