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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3 10:17:03 조회 : 602         
민족교회, 안동교회 이름 : 김승학   

민족교회. 안동교회 

 

1. 안동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

 

   부산을 거점으로 선교하던 배위량(William M. Baird) 선교사는 조사인 서경조와 소년 박재용, 그리고 마부 두 사람을 대동하고 1893년 4월 17일 부산을 출발하여 5월 20일 부산으로 돌아가는 무려 1,240 리(里)나 되는 전도여행을 통해 경상북도 지방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부산 동래, 밀양, 청도, 대구, 상주, 안동, 의성, 신령, 영천, 경주, 울산, 동래 등을 방문했다. 배위량 선교사는 복음을 들고 어느 누구도 밟지 않은 땅인 미답지(未踏地)인 경북지방을 향해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발걸음을 옮겼지만 그 발걸음은 그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거룩한 은혜의 걸음, 구원의 걸음이 되었던 것이다. 배위량 선교사 일행이 안동 땅에 첫발을 디딘 역사적인 날은 1893년 5월 5일이었다. 선교보고에 의하면 배위량 선교사는 다음날 아침 낙동강을 건너 경주로 향할 것임을 밝힘으로써 안동에 배위량 선교사가 머문 시간은 만 하루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전도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한 안동 방문이었다 하더라도 배위량 선교사에 의해 이 때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성장해 결국 안동 땅에 여러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후 1899년 대구선교부가 설립되자 안동은 대구선교부의 관할 지역이 되었고, 안동을 포함하는 경북북부지역은 대구선교부의 주된 선교 타겟(Target)이 되었다. 대구선교부 주재 방위렴(W. M. Barrett) 선교사는 1903년 안동의 첫 학습자이자 안동의 첫 열매를 얻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특히 미국북장로회 선교회가 1908년 9월 정기총회에서 안동선교부를 설립하기 위한 예비 작업을 결정하고 1909년 9월 정기총회에서 안동선교부 설립을 최종 결정한 후 안동을 중심으로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선교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선교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안동에 선교부가 확정될 당시인 1909년, 안동의 인구는 약 15,000명 정도의 작은 도시였지만 선교사들에게 호감을 주었다.

  

 

2. 안동교회의 설립 배경과 초대교인

 

    1893년 복음이 안동 땅에 전해 진 이후 선교사들이 안동을 포함한 경북 북부지역에 복음을 전한 결과 1909년 8월 8일(둘째 주일) 8명이 모여 감격스러운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안동 읍(邑) 최초의 교회인인 안동교회가 출범하게 되었다. 1909년 8월 둘째 주일인 8일은 안동 땅에 처음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 날이다. 이날 8명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안동 읍에서 처음 드린 예배였고, 이 결과 안동교회가 탄생했다. 안동 성(城) 서문 밖 초가 5칸인 기독서원이 안동교회의 첫 예배처소였다. 안동교회는 거의 1년 동안 이 기독서원(基督書院)에서 예배를 드렸다. 1909년 11월 원주에서 대구를 거쳐 오월번 (Arthur G. Welbon) 선교사와 조사(助事)인 김영옥(金泳玉)이 안동에 도착했는데, 조사인 김영옥이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다. 첫 예배 후 1년이 지날 즈음 회중의 수가 무려 75명이 되어 공간이 비좁아 기독서원에서 더 이상 이곳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어 이곳을 떠나 첫 교회를 건축하였다. 안동교회는 선교사가 주도적으로 세운 교회가 아니라 선교사들의 전한 복음을 수용한 자생적(自生的)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세워진 토종(?) 교회로 안동교회의 시작은 1년 전인 1908년부터 안동선교부 설립을 준비하던 선교사들에게도 힘을 실어주었다.

 

    첫 예배를 드린 초대교인의 이름은 김병우, 강복영, 원화순, 원홍이, 권중락, 박끝인, 정선희, 김남홍 제씨였다. 그리고 예배 인도자는 당시 매서(賣書)인 김병우였다. 김병우는 이후 1913년 안동교회의 초대장로이자 안동북부지역의 첫 장로가 되었다. 첫 예배의 참석자들은 안동교회가 안동지역의 복음화를 여는 풀뿌리가 되었다. 첫 예배자 8인 중에는 이미 교회에 나가던 사람도 있었고, 그 날 처음으로 예배에 참석한 사람도 있었다. 또한 남성(男性)은 김병우, 강복영, 권중락, 박끝인 등 4명이며, 여성(女性)은 원화순, 원홍이, 정선희, 김남홍 등 4명으로 남녀가 균형을 이루었다. 하나님께서는 첫 예배자 성(性)의 수(數)를 각각 4명으로 동일하게 하셨다. 남존여비(男尊女卑)가 강한 유교의 고장 안동에서 안동교회의 첫 예배 모습은 남녀의 수(數)까지도 남녀평등 그 자체였다. 더욱이 초대교인 8인은 소산, 지곡, 지내, 안동 읍 등 출신들이었다. 초대교인은 성별과 연령, 출신지 등 까지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첫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안동교회의 미래를 분명하게 보여 주셨던 것이다. 첫 예배에서 보여주신 비전(Vision)대로 안동교회는 지난 100년 넘는 역사 속에서 남녀, 연령, 신앙경력, 출신지 등에서 균형 있게 성장하여 건강한 교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3. 민족교회로서의 안동교회가 행한 거룩한 사역

 

1) 안동교회 안에서 은밀하게 준비된 3·1만세운동

    안동지방의 기미년 3·1만세운동 시작은 두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다. 첫째 인물은 당시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재학생인 김재명이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족운동의 실태와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정보,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그의 부친인 안동교회 김병우 장로를 통해 안동교회로 제공하면서 담임목사인 김영옥 목사와 이중희 장로 등 교회지도자들이 3·1만세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두 번째 인물은 당시 동경 유학생으로서 2·8 독립선언에 참여하였던 강대극의 귀국으로 일본에서 안동으로 돌아온 그는 당시 안동군청 서기로 근무하면서 민족 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던 김원진과 접촉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비교적 집회가 자유로웠던 안동교회를 찾아 김영옥 목사와 이중희 장로 등 안동교회 지도자들과 의논한 결과 구체적으로 안동 3·1만세운동 날짜를 3월 13일(목요일) 장날로 정하기까지 하였다. 이 때 만세운동 모의에 가담한 안동교회 인사들은 김익현, 황인규, 김계한, 권점필, 김재성, 이인홍, 김정숙, 김병규, 이권애 등이며, 기독 청년들도 동참함으로써 구체적인 안동 3·1만세운동이 진행되어갔다.

 

   3월 13일 거사는 구체적으로 모의되었다. 김원진은 3월 11일 안동수비대 청사의 인부 4·50명을 설득하여, 안동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만세운동에 합세할 것을 약속 받기까지 하였으며, 강대극은 안동군 옹천군 집에서 만든 태극기와 격문을 은밀히 돌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동의 3·1만세운동은 3월 12일, 김영옥·이중희·강대극·김원진 등 주역 4인이 거사 하루 전날에 검거되어 조사를 당함으로써 좌절되는 듯 했다. 하지만 일경은 만세운동 계획에 관한 단서를 잡지 못했고, 결국 주역인 4인은 석방됨으로써 다시 만세운동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안동 3·1만세운동이 한차례 위기를 넘긴 것이다. 그러나 검거되어 조사를 받은 4인 중 한 사람인 이중희 장로는 당시 60세로 투옥 중 얻은 질병으로 석방된 지 6일 만에 별세하였다. 비록 첫 거사일자인 3월 13일을 놓쳤지만 만세운동의 주도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비밀스럽게 다음 장날인 3월 18일을 거사일자로 정하고 인원배치, 동원계획 및 만세삼창 장소까지 세밀하게 수립하였다.

 

   그러던 중 국내외 정세에 대한 정보접촉이 다른 사람보다 유리했던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 이상용선생의 실제인 이상동(영덕 포도산 교회) 장로는 독자적인 계획 하에 안동 장날인 3월 13일 단독으로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체포 구속되었다. 비록 이상동 장로와 의논하여 결정한 거사일자는 아니었지만 가장 먼저 안동 3·1만세운동을 주도한 지도자들에 의해 결정한 바로 그날인 3월 13일 장날 오후 5시 반경에 안동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상동 장로의 1인 시위를 안동면의 1차 시위로 본다. 특히 이상동 장로는 ‘대한독립만세’가 쓰여진 태극기 모양의 종이 연을 들고 현재 신한은행 앞에서 동쪽 방향인 삼산우체국 쪽으로 달리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그는 체포되어 압송되어 가는 자동차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 대한민국은 10일을 넘기지 않고 독립될 것이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만세를 불렀다. 이상동 장로의 1인 시위는 안동 3·1만세를 은밀히 추진하고 있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위기가 되었는데, 이유는 만세운동을 감행할 인물들과 안동교회가 일경에 의해 보다 주시를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동 장로의 1인 시위는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던 지도자들의 검거와 조사로 위축되어 있던 모의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기폭제 역할도 하였다. 한편 안동교회 여성 지도자였던 김정숙, 김병규. 이권애 등 3인은 계명학교 여학생 30여 명을 동원하여 선교사 임시주택이었던 가옥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국기를 제작하여 비밀스럽게 만세운동에 참여할 준비를 하였다.

  

2) 교회 밖에서 공개적으로 일어난 만세운동

   계획된 거사일인 3월 18일(화요일)에 있었던 안동면의 2차 시위는 안동교회 교인들과 유림의 협동학교(協東學校)·보문의숙(寶文義塾)·동화학교(東華學校)의 교사와 학생들이 제작한 태극기와 격문을 사용했다. 특히 만세운동 시 유림의 대표격인 송천동의 송기식은 2차 안동시위 계획단계에서부터 이미 안동교회의 김병우, 군청서기인 김원진과 의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날인 3월 18일 낮 12시경, 동행한 김병우 장로와 김익현 조사는 지정된 장소로 가면서 약속된 만세 호창의 시간이 임박해지자 계획된 다른 그룹과 만나지 못해 결국 2인이 독자적으로 독립만세를 부르게 되었고, 그들의 만세 소리를 듣고 멀리 떨어져 있던 안동교회 교인 30여 명은 현재 신한은행과 농협안동지부 중간 지점인 삼산동 곡물전 앞에서 온 힘을 다해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남문통과 북문통을 오르내리며 시위를 벌였고, 이 때 천전(川前)의 협동학교를 중심으로 한 송기식·류동붕·송장식·송홍식·권중호·문소원·이종록 등 유림에 의해 주도되어 동문통에서 내려오고 있던 또 다른 시위대와 합쳐지고, 장터에 모인 읍민들도 합세하면서 안동 읍 최초의 대규모 만세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당시 임동에 소재한 협동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인홍에게 협동학교 측에서 임동의 만세운동에 참여해 달라는 연락이 있었는데 이인홍은 3월 18일 안동에서 만세시위가 있으니 차라리 안동으로 와서 함께 만세를 부르자고 하여 협동학교 학생 30여명이 안동으로 와서 안흥여관에 투숙해 있다가 일본경찰에 연행되어 시위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이 때 주동자로 보이는 14명이 체포된 후 시위군중은 일단 해산했다가 오후  6시경 다시 안동교회 교인 60여 명이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가 계속되었다. 밤이 되자 시위 군중들은 더욱 운집하여 19일 0시 50분경 2,500여 명으로 증가했는데, 당시 안동면의 인구가 5,502명이었음을 생각할 때 무려 50% 이상의 면민들이 참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동의 2차 만세운동으로 수많은 읍민들이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는데 안동교회 교인으로는 김병우 장로는 2년, 김익현은 1년, 김재성, 김계한, 이인홍, 황인규, 권점필은 6개월씩 각각 복역했다. 일반적으로 만세운동의 주동자들이 받은 형량에 있어서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인들에 비해 훨씬 무겁게 언도되었는데 이것은 일제의 대(對) 기독교 정책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계명학교 교사인 김정숙, 김병규, 이권애 등 여성 지도자 3명은 옥고를 각오하고 옷고름을 뗀 뒤 단추를 달고 계명 여학생 30여 명을 인솔하고 만세운동에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지도자 3명은 물론 계명학교 여학생 1명도 구속시키지 않았다. 아마 일경은 여론이 악화될 것을 염려하여 어린이와 여자 교사들을 구속하지 않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3차 만세운동은 3월 23일(주일) 오후 7시 30분 무렵부터 시작됐는데 앞선 2차 시위와는 다르게 안동군의 다른 면민들이 대거 참가하는 대중적인 시위 양상을 보였다. 무려 3,000여 군중이 모여 구금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경찰서와 법원지청으로 밀고 들어갔다. 일본 경찰과 수비대와 충돌로 인해 30여 명이 죽고 50여 명이 부상을 입을 정도로 시위는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이 시위의 시작은 안동교회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3) 3·1만세운동 후 안동교회 위상(位相)의 변화

   기독교인들은 독립운동과 기독교 신앙을 동일시하거나 하나님의 명령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참여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결과 기독교는 3·1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민족운동의 선봉에 섰고 일반 민중과 함께 투쟁의 장에서 만나게 되자 기독교에 대한 일반 민중의 시각이 달라지게 되었으며, 특히 1920년대 이후에는 교인들의 활동이 표면화되고 왕성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안동교회 교인들이 주동이 되어 3·18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자 지역 주민들은 교회를 보는 시각이 일신되었고 주민들 중 많은 사람들이 3월 18일이 지난 다음주일인 3월 23일 아침부터 교회 주변에 모여 교인들이 다시 만세운동을 선도해줄 것을 기대하면서 교회 주변에 온 종일 머물러 있을 정도였다. 특히 예배당 주변에 모였던 일부 주민들은 이날 밤에 자율적으로 만세를 부르게 되었다. 이렇듯 서양에서 전래된 지 수년 밖에 안 되는 기독교가 독립만세운동의 주역이 되자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일신되어 지역의 의식 있는 많은 인사들이 교회로 몰려오게 되었다. 그 결과 1920년 4월 8일 안동교회에서 안동기독교청년회 발기되었으며, 동년 9월 4일 안동기독교 청년회 창립총회가 열려 초대 회장에 안동 만세운동의 주역인 안동군청 서기인 김원진, 부회장에 김영옥 목사, 총무에 김주현, 부서기에 권중윤 등이 피선되었다. 이후 1921년 2월 5일, 우리나라 최초로 기독교 청년면려회가 당회의 허락을 받고 활동하게 됨으로서 신앙을 기초로 한 청년운동이 출범할 수 있게 되었다.

  

 

4. 민족 교회로서의 역할과 중심인물들의 사역

 

 1) 김영옥 목사

   김영옥(金泳玉) 목사는 신앙에 기초한 분명한 국가관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일제의 강압적인 지배 하에서도 교회를 지키면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독립운동에 헌신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김영옥 목사는 안동의 3·1만세운동의 주역이었다. 그의 주도 하에 모의되었고, 결국 3월 18일 안동에서 시위가 벌어지게 되었다. 또한 김영옥 목사는 1922년 1~2월 경 우리나라 각 지역의 대표적인 장로교 지도자 9명과 함께 평북 중강진 감옥 또는 경찰서에 압송된 적이 있었다. 중강진 감옥 압송사건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상해 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 관련 피의자로 50일 동안 혹독한 취조를 받고 석방되었다. 중강진 압송사건은 전국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374명이 서명 날인한 청원서를 상해임시정부를 대표하여 1921년 11월 12일부터 1922년 2월 6일 까지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회집한 국제군축회의(일명 태평양회의)에 참석한 9개국 대표들에게 배포했는데, 이 때 일제는 각 지역에서 시무하면서 이미 요시찰 인물로 감시 대상이었던 당시 교회 지도자들이 비록 청원서 명단에는 빠져 있었지만 중강진 감옥이나 경찰서로 압송해 혹독한 취조를 했던 것이다.

  

   또한 김영옥 목사의 중강진 감옥 압송사건은 독립공채모집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는 1922년 경산 사월교회에 부임하면서 경북 일대의 장로교 지도자들에게 비밀리에 독립공채모집을 독려하는 한편, 점포나 시장에 독립운동 선전물을 살포하게 하고, 국제회의에 조선독립을 청원하기도 했다. 포항교회(현 포항제일교회)를 담임으로 섬길 때는 1927년 4월 교회 중직자들과 상의하여 기독교 지도자들이 주도하여 전국적으로 참여한 독립운동인 신간회를 포항에 설치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김영옥 목사는 포항지역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로 신간회 회원이 된다는 것이 신상에 불이익을 당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신간회 영일지회를 발기하고 간사로 활동하면서 대회 의장까지 지내며 책임을 다했다. 김영옥 목사는 교회를 섬기면서 독립운동에 관계하다가 무려 네 번이나 일경에 체포 기소되어 재판을 받는 등 고난을 당했다. 그러나 나라를 사랑하는 일에 어떤 후퇴나 포기를 몰랐던 애국지사였다. 그의 이러한 정신은 해방 후에도 계속되어 남조선과도정부 문경군과 예천군의 민선 입법의원으로 피선되어 혼란한 국가를 위해 1년 동안 봉사하게 했다. 그는 언제나 교회의 파수꾼 노릇을 충실히 하였다. 조국독립운동을 위한 사회참여는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였다.  

 

2) 김정숙 전도사

   김정숙(金貞淑) 전도사는 1880년 11월 10일 김병연의 장녀로 출생해 1907년 27세 때 남편이 병사한 후 1908년부터 예수를 믿게 되었고, 1911년 오월번(Arthur G. Welbon)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1912년에 평양에서 안동으로 이주하여 7년 동안 선교사의 선교사역을 도우면서 노회와 교회를 섬기다가 1969년 90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김정숙 전도사는 손수 짚신을 만들어 신고 각 교회를 순회하며 전도했다. 안동교회를 비롯하여 예천, 용궁, 함창, 상주, 문경, 풍기, 순흥, 봉화, 영주, 예안, 영양, 영해, 영덕, 청송, 의성, 비안 등 당시 경안노회 전역에 다녔다. 그는 1915년 35세 때에 평양여자성경학교에 입학하여 1920년에 졸업을 하면서 전도사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후 1922년부터 본 안동교회의 전도사로 시무를 시작하였다. 여러 가지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시무하는 본 교회는 물론 경안노회 부인전도회연합회 사업에도 조직적이고 명석한 두뇌를 발휘하여 경안노회 여전도회(1928년~32년까지 회장역임)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평양여자성경학교를 졸업한 후 전도사로 안동교회에서 15년간을 시무했다. 더욱이 그는 경안노회 여전도회 사업과 여성의 사역에 혼신을 다함으로서 경안노회 경내의 여성사역에 초석을 놓았다. 김정숙 전도사는 전도사직을 은퇴한 후에는 안동교회의 권찰로, 임시집사로, 권사로, 여장년부 부장교사로, 또한 주일학교에서 어린이 사역에도 헌신함으로써 자신에게 맡겨진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이요 일꾼이었다.

 

   특히 김정숙 전도사는 1919년 3월 18일과 23일에 있었던 안동의 31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행동하는 신앙을 가진 믿음의 선배였다. 그가 교사로 있던 계명학교 학생들은 31만세운동에 필요한 태극기를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했다. 또한 일제 말엽에는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여성 지도자였다. 극한 박해와 신사참배문제 앞에 수많은 교회지도자들도 변절과 타협의 길로 갔지만,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죽음도 불사하면서 일제 앞에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참고로 경안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인물로는 이원영·강병철·박충락 목사, 권수백·김익현 장로 등 다수 있었다. 김정숙 전도사의 강직한 성품과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 그리고 성령 충만한 전도사역은 교회와 믿음의 후배들에게 사표가 되었다. 김 전도사는 얼마든지 자신의 보신(保身)의 길을 갈 수 있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일평생 험지(險地)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 여성이다. 그는 안동지역 초기 선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최초의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3) 김기한 장로

   김기한(金淇漢) 장로는 1916년 3월 6일 안동시 북후면에서 출생했다. 세 살 때 부모를 잃은 그는 전도사인 할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젊었을 때 서울에서 많은 믿음의 청년들과 교제했는데, 이것은 그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1940년 대 초 안동으로 귀향하여 그 후 안동을 떠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말엽과 해방 전후 안동에서는 유일하게 시집을 낸 시인이었다. 그의 ‘기도’라는 시(詩)는 식민지 당시 신사참배문제로 안동교회의 지도자들이 당한 참혹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교회에서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가르쳤던 김기한 장로는 좌절을 경험했지만 믿음으로 극복해 나갔다. 해방 이후 1945년 8월 26일 안동시 기독창립총회를 주도했고, 그것을 기념하면서 쓴 ‘재건’이라는 시에서 그는 해방의 기쁨과 자유를 통해 ‘무너진 집의 문은 열렸고’라고 쓰면서 앞으로 찬란하게 비칠 희망의 별을 노래했다. 특히 일제 강점기 말엽, 참혹한 625 전쟁으로 인한 절망과 상처를 감싸 안을 인물이 필요할 때 김기한 장로는 솔선하여 그 역할을 맡았다. 그가 쓴 시(詩) 곳곳에는 신앙인의 경건과 거룩을 찾아 볼 수 있으며, 개인의 복을 비는 차원을 넘어서 모든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사는 아름다운 사회를 그리고 있다.

 

   김기한 장로는 이전과는 다른 농사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그 누구도 생각하기 힘든 이상촌(理想村) 건설을 꿈꾸며 ‘향촌사’라는 농원을 마련했다. 채소재배, 양송이재배, 통조림 가공공장 등이 주력 사업이었다. 구체적으로 원예, 오이, 수박, 토마토 등 원예작물을 하우스로 재배하는 일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그는 동물 중에는 소를 가장 좋아했는데, 살아서는 갖은 노동을 다하고 죽어서는 자기의 모든 것을 주고 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운영하는 농원의 생산품은 늘 우수라는 평가를 받았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 농업기술자 상을 받기도 했다. 특히 경북북부지방에서 양송이 통조림 공장의 필요성을 언급될 때 김기한 장로가 적임자로 선정이 되었다. 선구자적인 결단으로 양송이 공장을 시작하여 대만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시작하였다. 김기한 장로는 교회 일도 열심이어서 1948년 11월 14일, 32세의 젊은 나이에 장로가 되었다. 그는 학생회와 청년회를 맡아 수고하는 진력했다. 생각해보면 그는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일을 앞서 계획하고 추진한 미래형 인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의 농원이 아니라 하늘나리의 농원을 위한 일에 필요하셨는지 1979년 3월 26일, 63세로 세상을 떠난 그를 교회는 그리워하며 1979년 3월 28일 교회장으로 장례했다.

  

   김기한 장로는 시재(詩才)가 있었고, 경리에 밝았으며, 그리고 능변이었다. 이러한 재능을 가진 김 장로는 안동 땅을 위해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시인인 그는 일제 강점기의 고난과 아픔을 믿음에 기초해 여러 시(詩)를 썼다. 그의 시는 당시 끔찍한 시대상과 고통스러운 국민의 마음을 너무도 잘 표현하고 있다. 특히 그는 농촌을 위해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다. 혁신을 넘어 혁명적인 농촌을 꿈꾸고 추진했던 인물이다. 특히 그가 꿈꿨던 이상촌인 ‘향촌사’는 성경에 근거한 에덴 동산과 같은 마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시도한 이상적인 마을은 시대적 여건과 국민 정서 상 그리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시도하고 낯선 길로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시도한 용기와 의지가 남달랐던 개척자였다.

  

4) 김광현 목사

   김광현(金光顯) 목사는 1913년 9월 22일 경북 의성군 봉양면 삼산동에서 김형동 장로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대구 희원보통학교와 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관서지방에서 법학 공부를 하던 중에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을 받고 신학으로 입문하게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거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김 목사는 평양신학교가 폐교되기 전에 일본 고베중앙신학교로 전학하여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김 목사는 일제의 탄압이 고조되던 일제 말기인 1943년 1월, 30세의 젊은 목사로 안동교회 제7대 목사로 부임하였다. 김 목사에게 있어서 담임목회는 안동교회가 처음이었다. 태평양전쟁이 일본군의 패전으로 기울어져 갈 무렵, 일제의 교회에 대한 박해는 날로 더해 갔다. 1945년 2월에 안동에 들어 온 일본 육군부대는 강제로 안동 교회를 육군기지로 징발되었다. 김 목사의 사택이 군영 안에 있으니 다른 곳으로 옮기라는 통보를 받고, 그 다음날 밤에 김 목사는 일경에 의해 구속되었다. 전국적으로 민족 지도자를 지목하여 기독교 목사를 구금하라는 지령을 받아 예비검속이라 하여 안동 교회의 김 목사는 8월 8일 자정, 안동경찰서에 수감되었다. 하지만 김 목사는 구금된 지 7일 만에 감방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특히 김 목사는 감방에서 광복을 맞이하고 그곳에서 풀려나오는 젊은 학생과 그 밖의 다른 사람들에게 일본인을 보복하지 말고 선으로 대하여 그들을 돌려보내자는 운동을 벌였다.

 

   해방 직후 남한에는 미군에 의한 군정이 실시되었는데, ‘한국인이 요구하는 법령은 한국인 스스로의 손으로 제정’하게 하기 위해 1946년 8월 24일에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이 창설되었다. 김광현 목사는 경북 24개 시⋅군에서 선거인단이 뽑는 민선의원 7명 중 1명으로 1946년 11월 중순에 피선되어 1946년 12월 12일 입법의원(立法議院)이 개원됨에 따라 문교사회분과에서 활동하다가 1947년 6월에 의원직을 사퇴하고 안동교회 목회사역으로 돌아왔다. 특히 김 목사는 1959~1960년도에 있은 총회의 분열과정에서 노회적으로 선한 영향력과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 결과 교단 분열의 진통 가운데서도 경안노회는 일체의 분열 없이 일치단결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뿐만 아니라 김광현 목사는 교단 분열이 있던 가장 어려운 시기인 1959년 9월 총회에서 서기 겸 총무의 중책을 맡았다. 1960년 9월 총회에서도 다시 서기로 피선되었고, 1961년 9월에는 총회서기 겸 명예 총무로, 62년, 63년, 64년 총회에서도 서기로 중임되어 화합의 리더십으로 총회와 교회를 위하여 헌신했다. 1966년 9월 22일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제51회 총회에서는 총회장에 피선되어 총회를 위한 사역에 대미를 장식했다. 특히 김 목사는 교회 연합운동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1966년 1월에는 안동 시 교역자회의 주최로 시내에 있는 개신교와 천주교 양 교회의 교환예배를 드리게 되어 20일 저녁에 천주교회에서 열렸는데, 이때 김 목사가 설교했다. 당시로 보면 획기적인 일로 김 목사는 교회 연합과 일치라는 에큐메니칼 정신이 누구보다 뛰어난 인물이었다.

 

   김광현 목사는 오랜 기도 끝에 교회의 분위기 쇄신과 전도 활성화를 위해 자신의 정년을 5년 남긴 시점에서 조기은퇴하기로 결심하고, 안동 교회에서 시무 30주년을 맞이한 김 목사는 1973년부터 5년을 더 시무한 후 1978년 자신의 70세 정년을 5년 앞당겨 조기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당회에 밝혔다. 적극적으로 만류하던 당회는 김 목사의 의사를 수용하고 1980년 3월 4일 원로목사 추대식을 거행했다. 이러한 김 목사의 결단은 당시로서 전례가 없는 일로, 젊고 의욕 있는 후진에게 목회의 길을 열어주겠다는 살신성인의 모범적 사례가 아닐 수 없었다. 민족의 성쇠와 맥을 같이 해 온 그의 탁월한 식견과 깊은 통찰력은 안동교회는 물론 경안노회와 한국 교회의 발전에 큰 공헌을 끼쳤다.

  

 

5. 중단 없이 민족과 함께 한 안동교회

 

    안동교회는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이후에도 중단 없이 민족과 함께 하는 거룩한 발걸음을 걸은 교회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별세한 후 찾아온 민주화의 봄은 군부의 개입으로 좌절되었고, 민주화를 간절히 바라던 청년대학생들은 크게 낙심하였다. 특히 군사정권의 계엄령과 긴급조치 등은 학생운동을 크게 위축시켰다. 따라서 격동과 암흑의 시기인 1980년대 청년들은 울분을 토로할 집회를 계획했지만 그 뜻을 이루기는 어려웠다. 이때 안동교회는 민주화의 열기로 가득했던 기독청년들에게 적극적으로 집회장소를 제공했다. 특히 본 교단 청년전국연합회(장청)가 선교교육대회를 위한 장소를 청원했을 때 모두 허락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우선 안동교회는 1980년 2월 6일부터 9일 까지 제30차 장청 선교 교육대회를 허락했다. 주제는 ‘기독 청년과 사회정의’로 전국 각 노회의 청년연합회 청년 1,240명이 참석하였다. 10⋅26 사태 이후 여전히 민주화가 불확실한 계엄 상태였고, 추운 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박 4일 동안 뜨거운 열기 속에 계속된 선교교육대회는 성도들의 협력으로 은혜 가운데 마쳤다. 또한 1982년 2월 16일부터 18일 까지 3일 동안 농촌지역 청년들이 선교활동과 교육 프로그램 향상을 위한 대회가 안동교회에서 개최되었다. 뿐만 아니라 1987년 8월 12일부터 15일까지 3박 4일 동안 장청 제38차 대회가 안동교회, 경안고등학교와 서부교회에서 분리되어 개최되었다. 주제는 ‘장청, 너 평화의 사도요!’였다. 이 시기는 5공화국에서 6공화국으로 전환되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시기로 기독 청년들은 선교교육대회를 통해 전국 복음화와 정의 사회구현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이때도 안동교회는 선교교육대회에 참석한 청년들을 위해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 2004년 여름, 머리가 희긋희긋한 당시 장청 임원들은 가족들과 함께 1980년 초 안동에서 있었던 민주화 운동을 회고하며 기념비를 들고 안동교회를 찾았다. 다음은 기념비 내용이다. “기념비. 안동교회는 김광현 원로목사님, 감기수 원로목사님을 비롯한 모든 교유들의 협력을 제30차 장청총회(1979년 3월 24일)와 제30차 겨울선교교육대회(1980년 2월 6일~9일), 제1차 장청농촌선교교육대회(1982년 2월 16일~18일), 제38차 정의와 교회갱신,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며 투쟁한 장청인들에게 끊임없는 기도와 지원하려 주심을 감사드리고, 이제 25주년을 기념하는 기념예배를 본 안동교회에서 드리며 모든 장청인의 이름으로 이 기념비를 세웁니다. 2004년 8월 21일, 대한예수교장로회청년회 전국연합회 장청동우회 회원일동.”

  

   1980년 언론통폐합 조치로 우리나라 유일의 민간 기독교 방송인 CBS가 뉴스, 정치평론 등을 박탈당해 방송고유의 기능을 더 이상 할 수 없었으며, 광고 수입이 없어 빈사상태에 이르렀을 때 기독교 방송 정상화를 촉구하기 위해 1986년 7월 6일 전교인이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더욱이 1980년 발생한 민주화의 봄과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구속된 본 총회 장청임원들을 돕기 위해 1980년 6월 1일 교회가 헌금을 결정했다. 또한 민주화를 위해 해직된 교수들과 민주인사들을 돕기 위해 1981년 10월 25일 종교개혁주일과 1982년 11월 7일 두 차례에 걸쳐 헌금하여 총회에 기탁했다. 특히 안동교회 고등부 교사였던 전경상⋅김대성 집사가 매주 토요일 경안신학원에서 KSCM(한국고등학생기독교운동총연맹) 안동지구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시국에 관한 비판과 참고서적을 소개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학생들에게 반체제 이념교육을 한다는 구실로 1986년 11월 19일 안동경찰서는 두 집사를 입건⋅구속하였다. 당시 농협직원인 전경상 집사는 구류 10일, 경덕중학교 교사인 김대성 집사는 구류 20일에 처했다. 이에 안동교회와 교계는 이것이 명백한 종교탄압이며 인권침해로 보고 당국에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당국이 불응하는 가운데 구류기간이 만료되었다. 이 후 당국에 의해 전경상 집사는 의정부 농협으로 좌천 되었고, 김대성 집사는 면직 처리되어 안동교회 당회는 강력하게 항의하며 원상회복을 주장했지만 성취되지 못하다가 1987년 6⋅29 선언이후 민주화 시대가 열리면서 두 집사 모두 복직되었다.

 

    이처럼 안동교회는 1909년 8월 8일, 교회 창립과 함께 중단 없이 민족과 함께 한 교회였다. 한일합방이 된 이듬해 여자초등학교인 계명학교를 세우고, 1924년 경안중학원, 그리고 1948년 안동유치원을 설립하여 안동지역의 다음세대를 신앙으로 교육하는 사역에 최선을 다했다. 특히 1919년 안동 31만세운동을 모의하고 주도한 교회였다. 이 일로 인해 교회는 많은 고초를 당했다. 거사(擧事) 전에 검거된 김영옥 담임목사와 이중희 장로는 많은 고초를 당한 후 석방되었지만 이중희 장로는 석방된 지 일주일 만에 고문 휴유증으로 별세했다. 또한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김병우 장로는 2년, 김익현은 1년, 김재성, 김계한, 이인홍, 황인규, 권점필은 6개월씩 각각 복역함으로써 안동교회는 많은 고초를 당했다. 하지만 안동교회는 담임 목사와 평신도 리더들이 중심이 되어 민족의 고난에 적극적으로 동참함으로 민족을 위한 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했다. 특히 안동교회 초대 담임인 김영옥 목사는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워진 교회의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이었고, 생명을 걸고 자신의 몸을 던진 지역사회의 지도자요, 국가와 민족을 누구 보다 사랑한 독립운동가요 애국자였다. 그 결과 그가 머문 자리가 고난의 자리였지만, 동시에 거룩한 흔적을 남긴 자리였던 것이다. 해방의 기쁨과 6⋅25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안동교회는 중심을 잡고 지역교회와 지역사회를 위해 본분을 다했다. 안동교회 7대 담임인 김광현 목사는 해방 후 오늘의 국회 전신(前身)인 입법의원으로 피선되어 활동했으며, 노회와 총회를 위해서도 헌신한 주의 종이었다. 김기한 장로도 당시 농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향촌사를 꿈꾸며 농촌의 이상마을 건설을 시도한 혁신적인 인물이었다. 더욱이 민족과 함께 한 안동교회의 사역은 그 후에도 중단 없이 계속되어 민주화의 봄이 좌절되고 군부가 집권하던 암울한 시기인 1980년 대, 위험을 무릅쓰고 집회 장소를 적극적으로 제공하는 등 기독청년들에게 희망을 줌으로써 후일을 기약하게 한 내일의 교회였다. 이러한 민족과 함께 하는 안동교회의 거룩한 발걸음은 시대의 상황에 맞게 오늘도 계속되고 있으며,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안동교회는 민족복음화를 위한 선한 사역은 계속될 것이다.

  

 

2018년 10월 1일

김승학목사

  김원 19-07-03 16:13 
위 글에서 언급한 김기한 장로님의 시입니다.

祈禱(이 民族을 버리시나이까)
하나님이여!
사랑의 하나님이여!
이 民族을 버리시나이까?
永遠히 버리시나이까?
하나님이여!
正義의 하나님이여!
殘忍한 日本은 三千萬 이 民族을 단번에 목을버일 準備를 하고 있나이다.
더욱이 五十萬 當身의 百姓을 滅殺計陋을 하고 있나이다.
다만 제배를 채울랴는 戰爭目的如何를 考慮할 뿐이로소이다.
하나님이여!
贖罪의 하나님이여!
이 民族의 罪를 赦하여주옵소서
이 民族을 悔改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이여!
구원의 하나님이여!
이 민족은 죽엄을 覺悟했나이다.
할만하시면 이 民族의 呼訴를 들으시고
救援의 팔을 피시옵소서   -아멘-
  (19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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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建
우리는 苦悶하였다.
우리집 모두가 破壞되었다.
그러나 우리生命은 살아 있었다.
오늘붙어 우리집은 再建된다.
       x          x
영원히 滅하지 않는 盤石위에
어떠한 災火가 올지라도
어떠한 洪水가 밀려올지라도
破壞되지않을 우리집은 建設된다.
       x          x
우리는 大道를 發見하였다.
1.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2. 우리는 民族을 사랑한다.
3. 우리는 國土를 사랑한다.
오-主여 우리는 이길을 가오니……,
       x          x
悲歡과 痛哭은 지나갔다.
문허진 집 문허진 집의 門은 열렸다.
오-우리는 높이 自由의 날개를 펼치자.
우리의 前途에는 希望의 별이 燦爛하다.
(1945년 8월 26일, 基靑創立總會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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