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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31 11:27:25 조회 : 829         
100년 넘는 세월 동안 분열 없는 교회 이름 : 김승학   

100년 넘는 세월 동안 분열 없는 교회


2017년 정유년, 한국장로교회는 100회 총회를 보내고 있습니다.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교파지만 분열(分裂)의 아픔도 함께 해야 했습니다. 장로교 선교 130년 역사 속에서 장로교회는 유래 없이 급성장했지만 동시에 분열에 분열을 거듭해왔습니다. 따라서 지난 한국장로교회 100년의 역사는 성장의 역사인 동시의 분열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로교회는 성장하면서 분열하고 분열하면서 성장해온 것입니다. 장로교회의 분열의 징조는 193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는데, 첫 번째는 북쪽에 있는 교회들이 편중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결과 남쪽에 위치한 교회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음으로써 지역적 불만이 터져 나왔으며, 1934년부터 이런 지역적 감정이 표면화되었습니다. 두 번째 분열의 징조는 진보적 신학 사고에서 나타났는데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온 목회자들에 대한 경사된 시각은 분열의 싹이 되었습니다.


분열이 내재(內在)되어 있던 상태에서 장로교 주류 교단의 최초 분열은 1952년에 발생했는데, 일제 강점기 시절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가 투옥됐던 한상동, 주남선 목사 등이 중심이 되어 분열되었고 고신교단이라고 부릅니다. 이 교단은 1976년 제26회 총회 당시 사회 법정 소송에 대한 의견차이로 고신총회와 고려총회로 분열됐습니다. 두 번째 장로교회의 분열은 1953년에 발생했는데, 1940년에 개교한 진보적인 조선신학교를 둘러싼 운영과 신학적 입장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조선신학교를 지지하는 교역자들과 장로들은 조선신학교를 폐쇄하려는 총회의 움직임에 반발하여 1953년 6월 김재준 목사 등이 조선신학교에서 한국신학대학으로 개명(改名)하고 새로운 총회를 조직한 것이 한국기독교장로회(일명 기장)의 출발입니다. 1959년 9월 제4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 찬반문제로 통합 측과 합동 측이 세 번째로 분열됐습니다. 이후 중소교단의 분열이 계속되어 현재 장로교회 등록 교단의 수는 250개이고, 비등록 교단까지 합치면 400여개가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실정입니다. 장로교 총회 100회기인 2017년은 부끄러웠던 분열의 역사를 성찰하면서 진정한 자기반성이 필요한 해입니다. 지난 역사를 거울삼아 분열의 상처를 극복하고 일치, 연합과 화해를 이루는 새로운 원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108년 동안 단 한 번도 분열 없이 지역사회를 섬겨온 안동교회는 롤 모델(Role Model)이 될 수 있습니다.


안동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선교사는 장로교 출신 선교사였습니다. 부산에 파송된 배위량 선교사(William M. Baird)는 1893년 5월 안동을 순행함으로써 안동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 후 여러 장로교 선교사들이 안동을 포함한 경북 북부지역에 복음을 전한 결과 1909년 8월 8일(둘째 주일) 8명이 모여 감격스러운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안동교회가 출범하게 되었습입니다. 안동 읍(邑) 최초의 교회인 안동교회는 선교사가 주도적으로 세운 교회가 아니라 선교사들의 전한 복음을 수용한 자생적(自生的)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세워진 토종(?) 교회입니다. 서문 밖 초가 5칸인 기독서원이 안동교회의 첫 예배처소였습니다. 기독서원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교회 앞 도로 건너편 버스 정류장이 있는 대석동 129번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안동교회는 거의 1년 동안 이 가독서원(基督書院)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첫 예배 후 1년이 지날 즈음 회중의 수가 무려 75명이 되어 공간이 비좁아 더 이상 이곳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회중 수에 비해 너무 비좁은 기독서원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서원은 안동교회의 첫 예배처소로 오늘의 안동교회가 있게 된 안동선교의 영적 자궁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서원에서 더 이상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된 안동교회는 선교사들의 임시 사택에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선교사들의 임시사택은 안동교회 본당 서편에 위치한 교육관 자리에 있던 한옥집이었습니다. 1910년 2월부터 3명의 선교사들이 모두 안동에 체류함으로써 안동선교부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하자 선교사들이 거주할 사택이 필요해 기독서원 북쪽에 있던 큰 기와집 두 채를 구입하여 수리해 사용했습니다. 안동교회 교육관 터는 당시 독신 선교사였던 별의추 선교사와 권찬영 선교사가 거주했고, 지금의 석조 예배당 터인 다른 한 집은 오월번 선교사 가족이 거주했습니다. 기독서원이 예배처소로 비좁게 되자 별의추 선교사와 권찬영 선교사가 거주하던 임시사택에서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전한 예배처소는 기독교에 우호적인 고위 관료의 집으로 200명이 충분히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당시 급성장했던 안동교회의 새로운 예배처소로 이 가옥은 가장 적당한 장소였던 것입니다.


안동교회 세례명부에 따르면 1911년 3월 2일자로 세례 받은 사람은 권중한, 권병철, 황인규, 권대희, 권영택, 김재명, 원화순, 정선희, 권봉우 등 9명이며, 동년 8월 17일에 세례 받은 사람은 백낙우, 오일철, 박끈인, 강복영, 손영일, 권씨, 정씨, 권씨 등 8명입니다. 이것은 첫 예배를 드렸던 8명 중에서 김병우를 제외하고 7명 모두 세례를 받지 않은 상태였으나 예배가 거듭됨에 따라 세례자의 수가 크게 증가하게 되어 교회 본연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례자의 연령 분포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10대는 1명, 20대는 4명, 30대는 3명, 40대는 1명, 50대는 3명, 60대는 5명으로 세례자는 전 연령에 걸쳐 고루 퍼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안동교회가 창립된 지 불과 1년 만에 세대에 관계없이 놀라운 부흥을 통해 안동지역에서 중심교회로 발돋음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놀랍게 성장하고 있던 안동교회는 더 이상 선교사 사택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어 새로운 예배처소를 계획하고 첫 예배당을 건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1910년 9월 23일 16칸 ‘ㄱ’자 예배당 신축을 위한 부지(敷地)를 구입하여 땅을 파는 기초공사를 했습니다. 당시 안동교회 성도들은 예배당 건축을 위해 정성껏 헌금을 했는데, 특히 1910년 10월 9일 주일 오후 예배 시 예배당 건축을 위해 특별헌금을 했음을 오월번(Arthur G. Welbon) 선교사의 부인인 새디(Sadie Welbon) 여사가 쓴 다이어리는 밝힙니다. 예배당 건축은 공사를 시작한 지 1달이 지나 마칠 수 있어 10월 30일 주일에 16칸 ‘ㄱ’자 예배당에서 감격적인 입당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30평에 가까운 예배당 신축을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마치고 준공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성도들의 헌신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신축된 ‘ㄱ’자 예배당에서 1910년 11월 13일부터 20일 까지 1주일 동안 평양 장대현교회 담임인 길선주 목사를 초청하여 특별부흥집회가 있었는데 각 교회의 지도자들과 직분자들 150명의 성도들도 함께 참석했습니다. 매 집회 시간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집회 시에 무려 98명이 결신을 했는데, 이 수는 이미 안동 읍에 존재하는 것으로 언급된 그리스도인의 수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특히 집회 마지막 날에는 만원을 이루어 예배당이 꽉 찼는데, 새디 여사의 다이어리에 따르면 신축한 이 예배당은 최대 40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안동교회의 첫 예배당인 16칸 ‘ㄱ'자 예배당이 준공된 1910년 10월 30일 이후에도 교인수가 급속도로 증가하여 불과 준공된 지 수개월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지도자들은 예배당 신축을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안동교회는 다시 새로운 예배처소를 물색하다가 오늘의 안동교회 100주년 기념관이 서 있는 부지로 이사하게 됩니다. 폭발적인 성장 속에서 안동교회의 두 번째 예배당인 목조 함석지붕 2층 예배당은 1913년 11월에 공사를 착수하여 1914년 2월에 준공되었습니다. 공사가 겨울에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빠르게 진행되어 이듬해인 1914년 봄이 되기 전에 예배당 공사는 완료되었던 것입니다. 신축 예배당은 길이 50척, 폭 40척으로 당시로 볼 때 비교적 큰 규모의 건축물이었습니다. 평소 주일예배 시 300~4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린 경험이 있는 연세 많은 성도들에 따르면 예배당이 최대 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고 기억합니다. 하지만 보통 교회에서 부흥사경회나 다른 형태의 집회 시에는 강대상까지 올라가 앉았던 것을 볼 때 이보다 더 많은 인원이 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참고로 안동교회 80년사에 따르면 이 예배당이 존속되어 있을 때인 1924년 6월 1일~1925년 5월 31일까지의 교인수는 장로 3인, 세례교인 152명, 교인총수는 380명이었고, 경안노회록은 1934년에는 159명의 아동을 포함해 총 549명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안동교회의 두 번째 예배당이 신축됨으로써 교회와 경북북부 지역은 영적 지형의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교회 내적(內的)으로 넓은 예배 및 활동 공간의 확보로 인해 예배와 주일학교의 활성화를 가져왔습니다. 주일학교가 양적으로, 또한 질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20년대 안동교회의 주일학교는 유년부, 남장년부, 여장년부 3부서가 존재했습니다. 주일학교는 신축된 예배당에서 주일 아침 9시 예배를 시작하여 1시간 동안 예배를 드린 후 계속해서 분반하여 지정된 교사에 의해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남장년부에는 청·장·노년의 광범위한 연령층이 함께 모여 성경공부를 했으며, 공부시간은 주일 아침 유년부(오늘의 초등학생부)의 예배와 성경공부가 끝난 뒤 곧 바로 10-11시부터 예배당을 이용하였습니다. 성경공부교재는 아동부와 마찬가지로 선교본부로부터 가져온 교재 원본을 등사하여 담임목사와 선교사들이 교사들에게 가르친 후 분반공부 시 사용했습니다. 여장년부는 3부서 중에서 가장 활성화된 부서였으며 유년부 예배가 끝난 후 남장년부와 동일한 시간에 휘장으로 분리된 예배당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목조 2층 예배당의 준공 이후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세례교인 수는 계속 증가했습니다. 안동교회 당회록에 따르면 성찬에 참여한 수가 1913년 66명, 1914년 73명, 1915년 160명, 1916년 240명, 1917년 230명, 1918년 240명으로 지속적으로 증가했습니다. 또한 경안노회록에 따르면 1922년 6월 1일부터 1923년 5월 31일 까지 장로 3명, 세례교인 174명, 교인총수 366명, 1924년 6월 1일부터 1925년 5월 31일 까지 안동교회 교인수는 장로 3명, 세례교인 152명, 교인총수는 380명이었고, 1927년 6월 1일부터 1928년 5월 31일 까지 장로 3명, 세례교인 180명, 유아세레교인 49명, 교인총수는 467명이었고, 급기야 1931년 6월 1일부터 1932년 5월 31일 까지 장로 4명, 세례교인 198명, 유아세례인 73명, 교인총수 549명으로 안동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계속해서 크게 부흥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흥하고 있던 안동교회는 발상(發想)의 전환을 하게 됩니다. 그 때 까지 안동교회는 안동 읍의 유일(唯一)한 교회였기 때문에 선의의 경쟁 없이도 계속적인 성장이 가능했지만 교회는 성장의 독점적인(?)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이것은 안동 읍에 필연적으로 또 다른 교회가 설립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타났습니다. 안동교회는 설립된 후 10여 년 동안 계속적인 부흥을 이루었지만 안동 땅의 복음화가 안동교회 혼자 감당하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으며, 그 결과 안동 읍내에 또 다른 교회의 출현을 필연적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당시 안동교회 지도자들은 안동 읍내에 하나의 교회만으로는 안동 복음화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효과적인 안동 땅의 복음화를 위해 안동 읍을 세 개 지역으로 나누고 분가식(分家式)으로 교회를 분립(分立)하기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안동교회를 중심으로 서쪽과 동쪽으로 교회를 분립하기로 하고, 안동교회 교인들을 거주지에 따른 분가를 추진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안동교회의 분립은 교회 내 분쟁(分爭)의 결과가 아니라 안동 땅의 복음화를 위한 자발적이고 창조적이며 아름다운 분리였던 것입니다.


안동교회의 첫 분립시도는 교회가 설립된 지 10여 년이 지난 후 시작되었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오늘의 안동서부교회입니다. 안동서부교회의 원래 이름은 안기교회였는데 그 이유는 교회의 위치가 안기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안기교회는 처음에 안동교회 기도실로 불러졌습니다. 안기교회가 위치한 안기동은 안기 조씨들이 씨족부락을 이루고 살아왔는데 이 지역 주민들은 매우 보수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전도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씨 문중 가운데 이미 예수를 믿고 있던 몇 명의 그리스도인이 복음의 씨앗 역할을 하였습니다. 사실 안동교회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안기동 지역에 전도인을 파송하여 집중적으로 전도를 했었고, 그 결과 1924년 1월 초가 6칸을 포함한 160평 대지를 매입할 수 있었습니다. 이 가옥을 안기지역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예배처소로 사용하고 안동교회 기도실로 명명했던 것입니다. 참고로 기도실은 공식적인 교회의 전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동교회는 주일 저녁과 수요일 저녁 마다 조사, 장로, 집사를 안동교회 기도실에 파송하여 예배를 인도하게 함으로써 공식적인 교회가 속히 설립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왔습니다. 이 때 봉사한 사역자들은 옥호열 선교사, 김익현 장로, 권점필·신석준 집사였습니다. 김익현 장로는 당시 골골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한 유명한 전도자였습니다. 그가 늦은 나이에 장로로 장립한 이유는 조사 및 전도 활동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안기교회의 분립은 당시 안동교회 담임인 정재순 목사의 결단도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1922년 6월 안동교회 3대 담임으로 부임한 정재순 목사는 지역전도에 전력투구한 교역자였습니다. 그가 시무한 기간 동안의 제직회록에는 안동교회 전도대의 활동보고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전도 결과에 따라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고 세우는 일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따라서 정재순 목사의 의욕적인 전도는 안기교회의 분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1926년 11월 28일, 안동교회 4대 담임인 박상동 목사가 전도집회를 통해 교회분립의 기초를 다진 후 교인들을 거주지 중심으로 이명(移名)시킴으로써 안기교회의 분립이 현실화되었습니다. 당시 안동교회로부터 이명 되어 안기교회의 초대교인이 된 성도들은 조광욱, 조홍로, 염씨, 조희규, 임춘심, 권대훈, 장덕만, 김점득 등이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안기교회로 이명된 교인 중에 장로 등 중직자가 한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1923년 까지 안동교회에는 장립한 장로가 8명이나 되었는데 안기교회로 이명한 장로는 한명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안기교회가 그동안 착실히 성장해왔으며, 평신도 지도자들이 없이도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튼튼한 기초를 가진 교회임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안기교회가 안동교회로부터 정식으로 분립하여 독립적 교회가 된 것은 1932년 8월이었습니다. 이 때 1924년에 구입한 초가 6칸 가옥을 매도한 후 안기동 130번지의 100평 대지 위해 30평 규모의 예배당을 새롭게 건축하고 안기교회라 칭하게 되었습니다.


1932년 11월에 열린 안동교회 제직회는 안동교회와 안기교회의 경계를 안기천(川)으로 하고 안기천 서편을 안기교회 교구로 지정했습니다. 다시 말해 안기천 중심으로 서쪽의 복음화는 안기교회가 책임을 지고, 안기천 동쪽은 안동교회가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안동교회에서 안기천 까지가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껴졌겠지만 실제로 안기천 까지는 그리 멀리 않습니다. 안동교회에서 가장 가까운 안기천은 걸어서 5분 정도 걸리며, 안기천 북쪽 끝도 차로 5분 이내의 거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동 읍의 복음화를 위해 안동교회는 교회분립이라는 큰 결단을 했던 것입니다. 안기교회는 1932년 12월 이원영 목사가 안기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고 이듬해인 1933년 12월 남수진 장로가 장립함으로써 부흥의 기초가 마련되었습니다. 3·1 만세운동으로 투옥되어 옥중에서 예수를 믿고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사가 된 이원영 목사는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으며, 그의 안기교회 담임사역은 안동 땅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 넣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꾸준히 성장하던 안기교회는 일제 말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원영 목사는 신사참배에 반대함으로써 목사 시무가 중지되었고, 4차례에 걸쳐 안동경찰서의 유치장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특히 일제의 방침에 따라 안동서부교회는 1942년 안동교회와 합병할 수밖에 없었고, 그 후에 교회가 폐쇄되는 수난도 당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해방 후 1946년 1월 둘째 주일, 안기교회 교인들은 철도 합숙소에 모여 교회 재건을 논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적당한 예배처소를 찾지 못한 안기교회 교인들은 안동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1946년 6월 경안신학원에서 재 분립의 첫 예배를 드렸으며 이원영 목사를 다시 담임목사로 추대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 후 1947년 9월 30일, 제43회 경안노회 허락을 받아 교회 이름을 안동서부교회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안동동부교회의 분립도 안동서부교회 분립과 같은 맥락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안동동부교회의 처음 이름은 역시 교회 위치에 따라 신세교회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안동 읍내 복음화를 위해 안동교회를 중심으로 동·서편에 교회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된 바 있었습니다. 이미 수년 전부터 서편인 안기동에는 전도를 통해 기도실을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교회설립 가능성이 한층 높아져 있었습니다. 안기동 쪽에 교회설립의 가능성이 높아지자 이제는 동쪽에 관심을 갖고 교회설립에 집중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경계는 예안·대구 도로로 이 도로(道路) 동편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신세교회가 책임을 지고, 서쪽은 안동교회가 맡기로 한 것입니다. 안기천과 마찬가지로 안동교회에서 이 도로 까지는 도보로 5분 이내(以內)의 거리에 있습니다. 이것은 안동교회가 얼마나 안동 읍 전역의 복음화를 위해 자신을 내려놓았는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1932년 2월 첫째 주일, 안동교회 교인 중 경계 동편에 거주하고 있던 남성 20명, 여성 40명, 어린이 50명, 총 110명을 이명시킴으로써 신세교회는 분립할 수 있었습니다. 신세동에 대지 100평을 구입하여 건평 40평의 함석지붕의 목조 예배당을 신축하고 교회 이름을 신세교회라고 명명했습니다. 1932년 5월 2일 안동교회 제직회의록에 따르면 안동교회 구내에 있던 포플러 나무를 신세교회 설립에 보조함으로써 분립된 개척교회를 힘써 도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신세교회의 분립에는 이상동 장로의 활약이 컸으며, 배영찬, 김익현, 김성규 장로도 참여했습니다. 신세교회 분립에는 안기교회와는 다르게 여러 장로들이 참여하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새로 분립된 신세교회로 이명한 것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신세교회를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했습니다. 신세교회가 비교적 빠르게 분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우선 안기교회의 분립에는 거의 10년 가까이 동안 그 지역 주민을 전도하고 또한 기도실 설치를 통해 착실히 준비해 온 과정이 있었습니다. 또한 아직 안기교회가 공식적으로 분립된 것은 아니지만 교회분립에 관한 노하우(know how)도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신세교회의 분립은 안기교회와는 다르게 훨씬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신세교회의 분립에는 뛰어난 평신도 지도자들의 지도력도 한몫을 했을 것입니다.


교회분립에 중심 역할을 한 이상동 장로는 안동 3·1 만세운동의 주역으로 영양 포산 출신이며 포산교회와 영덕 원전교회 장로로  리더십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상해 임기정부의 국무령이었던 이상용 선생의 실제(實弟)로 당시 정확한 국내외 정세를 갖고 안동의 3·1 만세운동을 계획하다가 장날인 3월 12일 안동군청 앞에서 단독으로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체포당해 구속되었습니다. 배영찬 장로는 안동교회 초대교인 8인 중의 한 사람인 정선이의 아들로 1923년 2월 안동교회 6대 장로로 장립했습니다. 김익현 장로는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한 신실한 조사로 1923년 6월 17일, 안동교회 8대 장로로 장립했습니다. 김성규 장로 역시 안동교회 9대 장로로 1925년 2월 8일 장립했습니다. 이들 모두는 안동에서 쟁쟁한 평신도 지도자였습니다. 이처럼 신세교회 분립에는 당시 유능한 평신도 지도자인 장로 네 사람이 참여함으로써 안기교회보다 훨씬 틀이 잡힌 상태로 출범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안동 읍내 동쪽의 복음화를 더욱 기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신세교회 설립과 함께 초대 목사로 안동서부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이원영 목사가 부임했는데, 이원영 목사는 안기교회와 서부교회 두 교회를 동시에 담임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1935년 11월에는 배영문 장로가 장립하여 당회가 조직되었고, 1936년에는 2대 담임으로 장하성 목사가, 1938년에는 3대 권태희 목사가, 1939년에는 4대 강신충 목사 등 당시 탁월한 지도자들이 차례로 교회를 섬김으로써 신세교회는 부흥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942년 일제 말 안기교회처럼 안동교회에 강제로 통합되었으며, 예배당 건물은 국방헌금이란 명목으로 강제 징발되는 아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 1946년 1월 첫 주일, 교회의 재 복구를 갈망하던 신세교회 교인들은 일제 시대의 신사(神社)를 미군정으로부터 불하받아 신관 사무소를 수리해 예배당으로 사용함으로써 신세교회가 새롭게 출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당시 안동교회 시무장로인 배영찬, 배영문 2명의 장로와 함께 남성 10명, 여성 20명, 어린이 20명 등 총 50명의 교인들을 이명시킴으로써 옛 신세교회를 재건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 1946년 6월 제40회 경안노회에서 교회 이름을 안동동부교회로 개명(改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당시 한약방을 경영하고 있던 배영찬 장로가 살고 있던 집은 안동교회 바로 동편 화성동 길과 붙어 있었습니다. 안동교회와 그의 집은 단지 몇 걸음 떨어져 있었습니다. 배영찬 장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초대교인의 아들입니다. 그는 안동교회의 세 번째 예배당인 석조예배당을 신축할 때 건축위원장으로 봉사했던 인물입니다. 또한 배영찬 장로는 교회와 노회에서도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도저히 모교회인 안동교회를 떠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안동교회가 신세교회로 이명을 결정했을 때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신세교회로 가는 순종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안동 땅의 복음화가 앞당겨지게 된 이유는 이와 같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이룬 결과임을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안동 땅의 복음화는 분쟁(分爭)에 의한 분열(分裂)이 아닌 창조적인 분리(分離)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 중심에 안동교회가 있었습니다. 1909년 8월 8일 첫 예배를 드린 안동교회는 설립된 지 첫 해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놀라운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안동교회는 안동 읍내에서 교회의 대형화를 꿈꾸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성장의 독점적인(?) 권리를 포기했던 것입니다. 이미 80여 년 전에 교회의 대형화(大型化)가 눈앞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교회를 쪼개고 분립하는 창의적인 계획을 세우고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그래서 안동교회를 중심으로 서쪽에 안동서부교회를, 동쪽에는 안동동부교회가 분립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안동·안동서부·안동동부 이 세 교회가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협력해 훗날 목격할 안동지역의 복음화를 위한 기초를 다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안동교회는 108년 동안 단 한 번도 분쟁으로 분열된 적이 없습니다. 안동교회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자율적으로 교회를 분리시켜 다른 교회들을 출산(出産)했습니다. 안동서부교회와 안동동부교회라는 새로운 교회, 다른 교회의 출산(出産)이 혹 발생할지도 모르는 안동교회의 분열을 사전에 막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솔리 데오 글로리아. Soli Deo Gloria.


2017년 1월 31일

김승학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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