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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4 20:59:10 조회 : 870         
안동교회 초대교인, 8인 이름 : 김승학   

안동교회 초대교인, 8인

 

 

안동 읍에 교인이 생기고 지곡까지 내왕(來往)하며 예배를 드린다는 소식을 들은 대구선교부는 5칸 초가집을 구입하여 기독서원으로 사용하면서 안동교회의 예배처로 정했는데 이것이 후에 경북 북부지방의 모교회가 된 안동교회의 시작입니다. 그 결과 1909년 8월 둘째 주일인 8일, 안동 읍(邑) 최초의 교회인 안동교회는 감격스러운 첫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안동 읍(邑)에서 시작된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을 위한 첫 예배였습니다. 장소는 현재 안동교회 앞 도로 건너편으로 5칸의 초가가옥이었고, 예배자는 8명이었습니다. 첫 예배를 드린 초대교인의 이름은 김병우, 강복영, 원화순, 원홍이, 권중락, 박끝인, 정선희, 김남홍 제씨였습니다. 그리고 예배 인도자는 당시 매서(賣書)인 김병우(金炳宇)였습니다. 안동교회의 첫 예배는 1년 전인 1908년에 세워진 안동선교부에도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1909년 11월 원주에서 대구를 거쳐 오월번 선교사(Arthur G. Welbon)와 조사(助事)인 김영옥(金泳玉)이 안동에 도착했는데, 조사인 김영옥이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첫 예배를 드린 후 1년이 지나 무려 75명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5칸은 오늘의 6.5평에서 8.5평 정도 규모로 무려 75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기에는 너무 협소했을 것입니다. 너무 공간이 비좁았기 때문에 더 이상 기독서원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좀 더 넓은 예배처소로 장소를 찾다가 임시로 선교사 임시사택에서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고 안동교회 80년사는 기록합니다. 참고로 선교사 임시주택 위치는 첫 예배 장소인 기독서원에서 길 건너 북쪽으로 수십 미터 떨어진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현재 안동교회 본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돌집 예배당에서 서편으로 불과 십여 미터 떨어져 있었습니다. 선교사 임시 사택은 100주년 기념관이 준공된 직후 철거된 교육관 위치로, 교육관은 1969년 8월 건평 90평 규모의 1층 건물을 신축한 후 2년이 지난 1971년 7월 70평의 2층을 증축했다가 1983년 12월 3층 117평을 증축하여 연건평 297평의 건물을 최종 준공한 바 있습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안동교회의 초대교인은 8인으로 이들 모두가 첫 예배를 드리기 전에 이미 예수를 믿고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상태에서 안동교회 첫 예배에 참석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사람은 있습니다. 안동교회 초대장로인 김병우는 이미 소산 출신으로 매서로 활동하고 있던 기신자(旣信者)였습니다. 또한 권중락, 강복영, 원화순, 정선희 등은 살던 동네 교회에서 예배들 드린 적이 있음을 장로교 사기 상권은 밝히고 있습니다: “권중락, 강복영, 원화순, 정선희 등은 방잠교회에서 분립된 영주 지곡교회에 내왕하며 예배를 드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남홍의 외손녀인 김점향 권사님에 의하면 외조모인 김남홍은 첫 예배가 있었던 당일 처음으로 예배를 드렸다고 증언합니다. 그는 예배에 참석하기 전까지 불신자(不信者)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안동교회는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함께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초대교인 8인 중에는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권중락과 박끝인입니다. 권중락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안동교회에 출석하기 전에 이미 다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사람으로 장로교 사기 상권에 기록됩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곳에서도 그에 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권중락은 23세인 1911년 3월 2일 안동교회에서 학습을 받고, 1914년 8월 9일 세례를 받았습니다. 또한 박끝인도 안동교회에서 39세인 1910년 8월 18일 학습을 받고, 1911년 8월 17일 세례를 받았지만 40세의 나이로 일찍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토대로 볼 때 초대교인 8인의 구성은 이미 예수를 믿고 있던 사람들과 그 날 처음으로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들 첫 예배의 참석자들은 안동교회가 안동지역의 복음화를 여는 풀뿌리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8인 중에서 남성(男性)은 김병우, 강복영, 권중락, 박끝인 등 4명이며, 여성(女性)은 원화순, 원홍이, 정선희, 김남홍 등 4명으로 남녀가 균형을 이룹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예배자 성(性)의 수(數)를 각각 4명으로 동일하게 하셨습니다. 남존여비(男尊女卑)가 강한 유교의 고장 안동에서 안동교회의 첫 예배 모습은 남녀의 수(數)까지도 남녀평등 그 자체였습니다. 더욱이 초대교인 8인은 소산, 지곡, 지내, 안동 읍 등 출신들이었습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안동교회를 이끌어 가실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안동교회 초대교인 8인의 면모(面貌)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안동교회 첫 예배를 인도한 김병우(金炳宇)입니다. 그는 소산교회 출신으로 매서(賣書)였습니다. 선교초기 성경이 매우 빠르게 보급되었다는데, 이것이 매서인들이 보여준 헌신의 결과라는데 이견(異見)이 없습니다. 매서인은 성서공회에서 월급을 받거나 성경을 할인받아 정가(定價)로 팔아 마진을 남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매서인들은 단순히 영리를 목적으로 이 일에 뛰어들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돈을 받은 것은 성경이 값진 책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매서인들은 성경과 찬송가를 비롯해 각종 신앙 서적과 선교 달력 등을 짊어지고 전국을 누비며 서당이나 노숙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책을 살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쌀이나 콩, 감자, 계란 등을 받고 팔았습니다. 초기 선교사들은 1~2명에서 많게는 8명까지 매서를 두었다고 교회사가 박용규 교수는 말합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이만열 위원장에 따르면 19세기 말부터 1945년까지 매서인은 무려 2천 명이나 되었을 것으로 추산합니다.

  

김병우도 안동지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을 도와 성경을 골골에 전함으로써 복음의 황무지와 같았던 안동지역의 복음화를 앞당기는 초석(礎石)이 되었던 것입니다. 김병우는 안동교회 첫 예배를 인도하는 감격과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안동교회의 첫 예배 인도자는 선교사가 아닌 한국인 평신도였던 것입니다. 첫 예배 인도자가 선교사가 아니고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은 안동교회가 선교사가 세운 교회가 아닐 뿐 아니라 교회의 중심인물도 한국인임을 의미합니다. 비록 복음은 외국 선교사가 전했지만, 복음을 수용하여 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이끌어 간 사람들은 민초(民草)인 한국인이었던 것입니다. 그 후 김병우는 1913년 7월 20일 안동교회 최초로 장로임직을 받았는데, 이것은 안동지역에서 최초의 장로임직이었고, 그 결과 안동교회는 안동지역에서 최초로 당회를 조직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3·1 만세운동 당시 세브란스 의학생이었던 장남 김재명으로 부터 서울에서 있었던 만세운동을 전해들은 김병우 장로님은 3·1운동 소식을 교회 지도자들에게 전달함으로써 안동의 만세운동을 위한 비밀모의가 진행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3월 18일 안동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김 장로님은 만세운동으로 체포된 7인의 우리 교인 중에서 가장 긴 2년 형(刑)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습니다. 김병우 장로님은 복음 전도자인 매서인으로, 투옥당해 고난을 당한 애국자로, 첫 장로인 교회 지도자로 영적인 팔방미인(八方美人)의 삶을 살았습니다. 더욱이 그의 장남은 의사로, 차남인 김재성 장로님은 안동교회와 경안노회에서 믿음의 거인(巨人)으로 활동한 평신도 지도자였습니다.

  

안동교회 8명의 첫 예배자 중에서 소개할 두 번째 사람은 강복영(姜福永)입니다. 안동에 도착한 선교사들이 임시로 거주하기 위해서 구입한 한옥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안동교회의 교육관이 서 있던 위치였습니다. 이 임시사택에서 1년 동안 소텔 선교사가 살다가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난 후 권찬영(John Y. Crothers) 선교사님과 플레처(Archibald G. Fletcher) 선교사님이 거주했는데, 세 선교사의 수발을 들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사람이 옹천 출신 강복영입니다. 안동교회 세례명부에는 1910년 8월 18일, 강복영이 27세의 나이로 14명과 함께 학습을 받은 것으로 기록합니다. 그런데 그는 15인의 학습교인 명단 중에서 처음으로 기록됩니다. 이것은 그가 안동교회 최초의 학습교인임을 의미합니다. 금곡동에 선교사 사택을 건축하고 선교사들이 이사한 후 강복영과 그의 모친인 원화순은 계속해서 이 선교사 임시사택에 거주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1930~40년 대 강복영은 안동교회의 종을 치며 수호인(守護人)처럼 교회 경내에 거주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강복영은 오늘날 선교관과 안동유치원 앞 사이에 있는 주차장, 그 당시에는 넓은 밭이었는데 이 곳에서 농사를 지었다고 현재 95세인 신월향 집사님은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동교회 80년사에 따르면 수호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924년 11월 20일 제직 회의록으로 “예배당 대문간에 있으면서 예배당 수호할 사람은 이재삼, 김성규 양씨에게 위임하여 있을 사람과 상의하도록 가결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937년 11월 8일 제직 회의록에 따르면 수호인(守護人)이 예배당 경내에 있던 밭을 경작하도록 했고, 극히 적은 보수를 지급했으며, 역대 수호인 명단에 강복영도 보입니다. 키가 크고 성격이 좋았던 것으로 기억되는 강복영은 1943년 12월 29일 당회에서 1944년 권찰로 임명되었고, 그가 1965년 5월 25일 별세했을 때 교회장(敎會葬)으로 장례를 치르고 안막동 자택 뒷산에 안장했습니다. 그 후 2013년 와룡면 나소리에 있는 안동교회 묘지로 이장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특히 강복영의 부친인 강만성과 모친인 원화순을 합장한 묘(墓)는 강복영의 묘 옆에 나란히 있습니다. 초대교인 8인 중 2명이 묻혀 있는 안동교회 묘지는 안동 땅 첫 복음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성묘(聖墓)와도 같습니다.

 

다른 초대교인 중의 한 사람인 원화순은 강복영의 모친(母親)입니다. 원화순은 아들 강복영과 함께 일찍이 옹천을 떠나 안동으로 이사해 거주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는 무려 50리 길을 매주일 내왕하며 영주 지곡에 있던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열심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안동 읍에는 교회가 없었지만 풍산과 방잠에는 이미 교회가 있었습니다. 풍산교회와 방잠교회는 지곡교회보다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따라서 강복영 모자(母子)가 안동 읍으로 이사 온 후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면 멀리 있던 지곡교회 보다는 가까운 곳에 있던 풍산교회나 방잠교회에 출석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강복영 모자가 지곡에 있던 교회에 매주일 갔던 이유는 그들의 고향인 옹천과 관계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동으로 이사하기 전에 이들 모자가 이미 지곡교회에 출석했을 가능성도 있고, 또한 안동으로 이사 나온 후 예수를 믿게 되었다면 옹천과 지곡 등에 거주하던 친지들이 출석했던 지곡교회에 나갔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동 읍에 첫 교회인 안동교회가 설립되면서 강복영 모자는 안동교회의 초대교인이 되었습니다.

  

원화순은 1910년 8월 18일 안동교회에서 학습을 받고 학습교인이 되었으며, 1911년 3월2일 세례를 받음으로서 안동교회 세례교인이 되었습니다. 안동교회는 1910년 첫 학습교인 15인을 세우고, 1911년 3월 2일 첫 세례를 베품으로 세례교인 9인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런데 첫 학습자 15인과 첫 세례자 9인 안에 포함되는 영예를 정선희와 함께 차지했습니다. 또한 원화순의 동생인 원홍이는 1911년 8월 17일 학습을 받고, 1912년 8월 15일 세례를 받음으로써 안동교회의 세례교인이 된 것으로 안동교회 세례명부는 기록합니다. 장로교 사기 상권에 따르면 원홍이는 언니인 원화순과 함께 지곡에 있는 교회에 출석한 명단에 기독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의 학습 및 세례일은 안동교회가 세워지고 난 후 1년 쯤 지나 언니의 전도로 안동교회에 출석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게 합니다. 원홍이는 1912년 8월 15일 55세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1925년 경 여전도회 경안연합회 서기로 수고한 김점향 권사님은 당시 우리교회 여전도회 회원이 30~40명 정도 되었는데, 회장이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원홍이, 원화순, 김남홍, 정선희, 이인홍 장로 모친, 장경영 권사님의 모친과 고모 등 제씨가 중심회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초대 교인인 원화순과 원홍이 자매는 여전도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뿐 아니라 교회의 여러 사역에 헌신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특히 원화순, 원홍이 자매의 세례 사실은 오월번 선교사의 부인인 새디(Sadie Welbon) 여사가 쓴 다이어리(Diary)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동교회 첫 세례자 9인을 기록하면서 두 여성인 원화순, 원홍이 이름을 직접 기록하지는 않지만 나이가 많은 두 여성이라고 언급하는데 안동교회 세례명부에는 그들의 나이를 50세가 넘은 것으로 명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동교회 세례명부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원화순은 57세(1911년), 원홍이는 55(1912년)세에 세례를 받은 것으로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김남홍은 1932년부터 1956년까지 무려 24년 동안 경안노회 여전도회 연합회 서기로 수고하고, 제37회 여전도회 총회 시 9대 회장으로 피선되어 헌신한 안동교회 김점향 권사님의 외조모(外祖母)입니다. 김점향 권사님이 외조모로부터 들은 안동교회 첫 예배가 있었던 주일 아침의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남홍은 1909년 8월 8일 주일 아침, 집 아래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답니다. 김남홍의 살림집은 현재 100주년 기념관 바로 뒤인 화성동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날 아침에 들려온 소리는 평소에 들을 수 없는 소리였습니다. 북을 치며 이리로 오라는 외침을 들었던 것입니다. 아마 누군가 주일 아침 북을 치면서 마을을 돌며 동네 사람들을 예배에 초대했던 것 같습니다. 여하튼 누군가 안동교회의 첫 예배를 위해 주일 아침 동네 사람들을 모으고 있었던 것입니다. 호기심을 가진 김남홍이 북소리를 듣고 발걸음이 머문 곳은 현재 교회 주차장 찻길 건너편 버스 정류장 앞인 기독서원 자리였습니다. 그곳에 있던 5칸 기독서원에서 안동교회의 첫 예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김남홍은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여기 오면 아들을 낳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였는데,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아들을 낳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후부터 빠지지 않고 예배에 참석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소리는 김남홍에게 구원의 소리, 좋은 소식(Good News)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그 후 김남홍은 안동교회 첫 예배에 참석한 초대교인이 되었고, 그에게 안동교회는 구원의 방주(方舟)요 영혼의 안식처(安息處)가 되었습니다.

  

김남홍의 남편은 첫 세례자 9인 중의 한 사람으로 이름은 권정택입니다. 그는 매우 늦은 나이인 62세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안동교회 첫 세례자 중에서 최고의 연장자입니다. 그의 부인이자 안동교회 첫 예배자 8인 중의 한 사람인 김남홍은 1910년 8월 18일 학습을 받고, 1911년 8월 17일 세례를 받음으로 안동교회의 세례교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안동교회에서 베푼 두 번째 세례였습니다. 또한 김남홍은 1913년에 조직된 안동교회 여전도회의 중심 회원이었습니다. 당시 여전도회는 매월 첫 번째 주일 화요일 저녁에 월례회로 모였고, 보통 약 30명 정도가 모였습니다. 월례회로 모여서는 예배를 드리고 헌금 순서도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여전도회 회원들은 주로 개인적으로 전도하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더욱이 생전(生前)에 김점향 권사님은 매우 중요한 증언을 남긴 바 있습니다. 그것은 외할머니인 김남홍이 세 살 된 자신을 등에 업고 기독서원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당시 안동교회의 첫 예배자는 8명이 아니라 9명이 되는 것이고, 어른들만이 아니라 아기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안동교회가 다음세대와 장년세대가 모두 포함된 교회로 시작한 것을 뜻합니다. 비록 한명의 어린 아기라도 이것은 안동교회의 미래를 미리 보여주는 거룩한 비전과도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밝혀진 첫 예배자의 연령은 3세인 김점향, 27세인 강복영, 24세인 권중락, 31세인 김병우, 38세인 박끝인, 45세인 김남홍, 53세인 원홍이, 55세인 원화순, 56세인 정선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동교회가 어린이, 청년, 장년, 그리고 노년이 적절히 균형을 이룬 건강한 교회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이미 시작할 때부터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그 이후 안동교회는 지난 100여 년 동안 어린이, 청년, 노인, 남성과 여성 등 전(全) 세대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건강한 교회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초대교인 중 밝혀진 마지막 사람은 정선희(鄭善姬)입니다. 첫 예배에 참석했던 정선희는 1910년 8월 18일 안동교회 학습교인이 되었고, 58세로 1911년 3월 2일 세례교인이 되었습니다. 이 학습식과 세례식은 안동교회가 거행한 최초의 학습식·세례식으로 교회는 15인에게 학습을, 9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정선희는 초대교인인 원화순과 함께 안동교회 최초의 학습교인인 동시에 세례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안동교회에 출석하기 전 이미 영주 지곡에 있는 교회에 출석하던 기신자(旣信者)였습니다. 안동에 거주하고 있던 그는 안동교회가 설립되자 멀리 있던 지곡교회 출석을 중단하고 안동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는 1913년에 시작된 여전도회 활동에도 헌신적이었습니다. 또한 1928년 창립된 여전도회 경안지회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헌신은 아들의 믿음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의 아들인 배영찬은 1923년 2월 안동교회 6대 장로로 임직을 받았습니다. 정선희는 아들 배영찬이 안동교회 장로로 임직 받을 수 있도록 믿음으로 양육한 어머니였습니다. 배영찬 장로는 안동교회와 경안노회, 그리고 신세교회(오늘의 안동동부교회)에서 헌신했습니다.

  

1909년 8월 둘째 주일인 8일은 안동 땅에 처음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 날입니다. 이날 8명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안동 읍에서 처음 드린 예배였고, 이 결과 안동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첫 예배자 8인은 이미 교회에 나가던 사람도 있었고, 그 날 처음으로 예배에 참석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초대교인의 성별과 연령, 출신지 등이 고루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외손녀 김점향 권사님의 증언처럼 김남홍이 아기를 업고 예배에 참석했다면 어린 아이도 첫 예배자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배자의 평균연령은 더 낮아질 것입니다. 첫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안동교회의 미래를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첫 예배에서 보여주신 비전(Vision)대로 안동교회는 지난 100년 넘는 역사 속에서 남녀, 연령, 신앙경력, 출신지 등 모든 면에서 균형 있게 성장하여 건강한 교회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1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많은 교회 중에서도 거룩하고 아름다운 흔적을 지니고 있는 대표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안동교회를 섬기고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동시에 우리 모두가 새로운 시대적 소명(召命) 앞에 서 있음도 강하게 느낍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너무도 두려운 시대에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첫 예배를 드린 초대교인 8인의 믿음이 우리에게도 요구됩니다.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찾아올지 모르는 위험을 두려워하지 말고 초대교인 8인처럼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 신속히 발걸음을 옮길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2016년 8월 14일, 창립주일

김승학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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