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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1 12:32:06 조회 : 1205         
선교사가 보낸 안동 최초의 풍금​ 이름 : 김승학   

선교사가 보낸 안동 최초의 풍금

 

안동의 교회음악에 처음으로 영향을 준 사람은 권애라(Ella McClung) 선교사님입니다. 권애라 선교사님은 1909년 12월 소텔 선교사가 풍토병인 장티푸스로 순교한 후 그 후임으로 1910년 1월 안동에 파송된 권찬영(John Y. Crothers) 선교사의 부인입니다. 권애라 선교사님은 초창기 안동에서 교회음악 외에 여러 선교사역의 중심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1928년에 조직된 경안노회 여전도회 연합회의 초대부터 5회(1933년) 까지 실무 책임자인 총무역할을 맡아 수고했습니다. 하지만 한국말을 잘 했던 것으로 알려진 권애라 선교사의 전공은 피아노였습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안동 땅에 교회음악을 소개하고 발전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안동교회 찬양대의 오랜 반주자요 지휘자였던 권애라 선교사는 어린이들의 노래 지도에도 헌신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11년 개교한 안동 최초의 여자 초등학교로 알려져 있는 계명학교 출신으로 현재 95세인 신월향 집사님의 기억에 따르면 권애라 선교사님은 계명학교 학생들을 1주일에 하루 금곡동 산에 위치한 자신의 사택으로 초대해 찬송가와 노래를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매주일 거의 거르지 않고 하루에 1시간씩 5~6곡의 찬송가를 배웠다고 신 집사님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권애라 선교사는 안동의 근대 교회음악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동교회의 찬양대는 당회의 허락으로 1928년 1월 20일 처음으로 조직되었습니다. 당시 안동교회 담임은 박상동 목사님이었는데, 그는 음악에 큰 관심을 가진 교역자였습니다. 하지만 일본 고베 신학교를 졸업한 박상동 목사님이 1926년 9월 안동교회에 부임하기 전 부터 선교사들의 음악적 관심과 활동으로 교회음악의 분위기가 이미 안동교회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안동 땅에서 첫 선교사인 사우대(Chase Cranford Sawtell)가 순교한 후 그의 부인인 캐더린(Katharine M. McClung)은 안동교회에 오르간을 기증했는데, 이 오르간은 안동 땅의 교회 음악에 매우 큰 공헌을 했습니다. 안동교회 성도들은 이미 뛰어난 반주자인 권애라 선교사님과 인노절(Roger Earl Winn) 선교사님의 부인인 캐더린(Catherine Winn) 선교사님의 오르간 반주에 맞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안동교회의 음악적 분위기는 안동교회에 시무하게 된 박상동 목사님과 그의 가정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박상동 목사님의 3녀인 박은수 사모님에 의하면 아버지 박상동 목사님이 음악을 매우 좋아했다고 증언합니다. 비록 아버지가 노래를 잘 부르지는 못했지만 노래를 듣는 것을 누구보다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가 1928년 8월 28일에 안동교회를 사임했지만 찬양대가 조직되기 전(前)이나 사임하기 전(前)까지 찬양대를 위해 적극적으로 도왔을 것입니다. 즉 박 목사님은 찬양대가 조직된 후에도 임지(臨地)를 일본으로 옮기기 전 8개월 동안 배후에서 찬양대 활동에 중요한 협력자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박상동 목사님은 안동교회 찬양대의 조직 뿐 아니라 시작 후 자리를 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특히 피아노 전공자였던 권애라 선교사님은 1928년 1월 안동교회가 찬양대를 조직했을 때 반주를 맡아 수고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처음에는 찬양대원 전원(全員)이 여성이었습니다. 이처럼 첫 찬양대는 인적(人的) 구성이나 화음(和音)의 면에서 불완전하게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일자는 알 수 없으나 후에 남성대원도 참여함으로써 보다 완전한 찬양대의 모습을 갖추어 4부로 찬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안동교회 80년사에 따르면 “최초 조직 당시에는 여성대원 만으로 구성되어 2부 합창을 하였다, 옥호열(R. Harold. Voekel) 선교사가 부임하면서 찬양대 활동이 보다 활기를 띠기 시작했으며 남자 대원이 참가하여 4부 합창을 부르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옥호열 선교사님 부부는 1929년 안동선교부에 부임해 1948년 안동을 떠났습니다. 따라서 찬양대원으로 남성이 보강된 것은 찬양대가 조직된 지 1년 정도가 지난 후였습니다. 안동교회는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남녀 모두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양대로 발돋음하게 된 것입니다. 안동교회 찬양대는 좋은 지도자의 열정과 기도, 그리고 대원들의 훈련과 헌신으로 짧은 시간에 그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안동지역의 초기 교회음악에 공헌한 두 번째 사람은 1914년 안동선교부로 파송된 인노절 선교사님의 부인인 캐더린 선교사님으로 그는 안동 읍(邑) 최초의 피아노 선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노절 선교사님은 권찬영 선교사님과 함께 단기성경학교인 여자성경학교를 시작한 분입니다. 교회 부흥이 하나님의 말씀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성경학교가 세워지기 전에 이미 오월번(Arthur G. Welbon) 선교사님의 부인인 새디(Sadie) 선교사님은 안동에 부임한 이후 자신의 사택에서 여성들에게 정기적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인노절 선교사님이 안동에 부임하면서 이전 보다 공식적이고 체계적인 여성 지도자 양성과정이 필요했고, 그 결실로 여자성경학교가 개교한 것입니다. 이 성경학교는 해방 후 경안안고등성경학교를 거처 경안신학원, 그리고 2015년 3월에 개교한 경안신학대학원대학교로 발전했으며, 2016년 2월 현재 졸업한 1800여명의 졸업생 중의 대다수가 전국과 세계 열방에서 수많은 주의 사역을 위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노절 선교사님은 안동 땅과 안동을 넘어 설립된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든든히 세워질 수 있도록 기초를 놓은 분입니다. 그런데 그의 부인인 캐더린 선교사님도 안동에서 감당한 사역은 하나님의 나라를 아름답게 만들어나가는 데 일조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캐더린 선교사님은 남편 소텔 선교사님이 하늘나라로 간 후 대구에서 1년 2개월 동안 사역을 계속하면서 안동교회에 풍금을 기증했습니다. 아마 1912년 초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물론 이전에 선교사님들이 안동으로 이사하면서 개인적으로 가지고 온 풍금을 있었는지는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참고로 이 풍금이 기증되기 전에 안동선교부 소속 선교사님은 오월번 선교사님 가정, 권찬영 선교사님 부부, 별의추(A. G. Fletcher) 의료 선교사님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피아노를 소장했을 가능성이 가장 큰 분은 권찬영 선교사님의 부인인 권애라 선교사님으로 그는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피아니스트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피아노를 가지고 안동으로 이사 왔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캐더린 선교사님이 기증한 풍금은 안동 최초의 풍금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물론 교회에 기증된 풍금 중에서 최초의 것은 캐더린 선교사님이 기증한 것이 확실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동에 처음으로 풍금이 들어왔을 때 교인들이 얼마나 신기했을까요? 처음 보는 악기, 처음 듣는 소리였을 것입니다. 풍금에서 울려 퍼지는 천상의 소리를 듣고 교인들은 흥분했을 것입니다. 추측하건데 피아노 전공자인 권애라 선교사님도 감격해하며 풍금을 연주했을 것입니다. 이 반주에 맞추어 온 교인이 부르는 찬송이 무척이나 크고 힘차지 않았을까요? 또한 인노절 선교사님의 부인인 캐더린의 풍금연주도 안동교회의 예배를 더욱 풍성한 은혜의 시간을 되게 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캐더린 선교사님이 기증한 이 풍금은 안동지역의 교회음악과 영남지역의 음악역사에 큰 공헌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리 나리 개나리' ‘봄나들이’ ‘꽃 피는 삼천리’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초생달’ ‘봄 오는 소리’ 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안동이 낳은 위대한 음악가 권태호 선생님이 어렸을 때부터 안동교회에 출석했고, 안동교회에서 선교사님으로부터 풍금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소년 권태호는 안동교회에 다니면서 안동교회 예배당에서 울려 퍼지는 풍금 소리에 매료되어 서양음악에 관심을 갖고 8세 때부터 캐더린 선교사님에게 풍금을 배운 것으로 전해집니다. 따라서 안동의 초기 기독교 음악은 캐더린 선교사님이 기증한 풍금으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고, 이 풍금은 훗날 안동교회 찬양대의 탄생을 도왔으며, 더 나아가 한국 현대음악의 선구자 중의 한 명인 권태호 선생님을 낳게 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풍금 기증자인 캐더린 선교사님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권애라 선교사님과 캐더린 선교사님의 열정과 영향은 훗날 소년 권태호의 음악적 소양에게 영향을 줌으로써 교회 뿐 아니라 한국음악에 공헌할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권태호는 1903년 9월 안동 율세동, 일명 밤샛골에서 안동교회의 초기 교인인 권중한(權重漢)과 모친 김귀행(金貴行)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권중한의 가정은 무척 부유해 안동의 3대 부호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더욱이 그는 안동교회 첫 예배자는 아니지만 교회가 설립된 이후 교회의 중심에 서서 안동교회를 세워나간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권중한은 안동교회가 1901년 8월 18일 처음으로 학습자를 세울 때 15인 중의 한 사람입니다. 또한 그는 1911년 3월 2일 안동교회 역사상 최초의 9명 세례자 명단에 최초로 언급되는 인물입니다. 이후 그의 3자녀들이 1913년 4월 4일(권석혜), 1915년 7월 11일(권태님), 1917년 6월 17일(권성혜)에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들 보다 먼저 출생한 장남인 권태호와 차남인 권태희는 나이가 초과되어 유아세례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권중한은 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사임직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의 차남인 권태희도 평양신학교를 거처 목사임직을 받은 후 1935년 8월부터 1937년 12월 까지 안동동부교회 제3대 담임목사로 사역했습니다.

 

이러한 신앙과 가정적 환경 속에서 권태호는 자연스럽게 교회 안에서 생활하며 서양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소년 권태호는 안동교회에 다니던 1917년 안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부터 안동교회 반주자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이미 권태호는 찬송가 172곡 전부를 4부 화음으로 연주할 수 있는 천재성을 발휘했습니다. 전해지는 사진에 의하면 소텔 선교사님이 별세한 후 부인인 캐더린 선교사님이 안동교회에 기증한 바로 풍금 앞에 양복을 입고 연주하고 있는 18세 때의 권태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진 속에 있는 권태호의 모습은 비록 애 때 보이기는 하지만 의젓한 연주가의 자태도 볼 수 있습니다. 안동보통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1918년부터 16세인 권태호는 정식으로 안동교회 반주자가 되었고, 특별예배 시에는 독창까지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후 권태호 선생님은 일본고등음악학교 재학 중이던 1927년 7월 2일 대구소학교(구 중앙초등학교) 대강당에서 독창회를 가졌는데, 이것은 대구 최초인 동시에 한국 최초에 평가받고 있습니다. 또한 1939년 4월 일본 빅터(Victors) 레코드사에 초청되어 우리나라 최초로 우리나라 말로 된 찬송가인 ‘하늘가는 밝은 길이’ ‘주 음성 외에는’을 취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음반에 수록된 찬송가는 대구제일교회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여러 교회들, 그리고 하여 만주의 조선교회에서 까지 주일예배 시 불려진 당시 대표적인 찬송가였다고 전해집니다. 이처럼 권태호 선생님은 근대 한국 음악과 교회음악에 중요한 음악가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안동의 교회음악에 공헌한 사람은 사은라(Sharrocks Ella. J) 선교사님입니다. 사은라(謝恩羅) 선교사님은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 샤록스(Alfred M. Sharrocks, 謝樂秀) 선교사의 장녀입니다. 1899년 9월 29일 내한한 부친 샤록스 선교사님과 모친 모리(Mory Ames)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에비슨(Oliver R. Avison), 웰스(James H. Wells)와 함께 의과대학 교과서인 해부학·생화학·생리학·약물학 관한 책을 역술한 바 있습니다. 그 후 북장로교 평안북도 선천 선교부가 개설되면서 그곳의 의료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샤록스 선교사님은 1919년 미국 미네소타주 로체스터에서 별세하였지만 그의 부인인 모리스 선교사님은 1938년까지 한국 땅에서 선교에 헌신하였습니다. 그 후 샤록스 선교사의 딸인 사은라 선교사님도 간호선교사로 부친의 뒤를 이어 1926년 의료선교사로 내한(來韓)했습니다. 사은라 선교사님은 벌코비치(Z. Bercovitz) 선교사님이 안동성소병원의 3대 원장으로 재임할 때 간호부장이었습니다. 그는 1952년 까지 안동, 대구, 서울 등지에서 사역했는데, 특히 안동에서 선교목적으로 병원직원으로 찬양대를 조직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찬양대는 짬짬이 시간을 내어 연습한 찬송을 환자들 앞에서 연주함으로써 환자들을 위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병원에서 발표했던 곡들을 안동교회 주일예배 시 특별찬양을 가짐으로써 1928년 1월부터 시작한 안동교회 찬양대의 효시(嚆矢)가 되었습니다. 사은라 선교사님이 안동에서 사역하는 동안 안동성소병원 찬양대와 안동교회 찬양대가 조직됨으로써 예배가 더욱 풍성해졌을 뿐 아니라 안동지역 교회음악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한국 땅을 밟으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가도 함께 들어왔습니다. 1885년 부활주일인 4월 5일,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선교사님과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a) 선교사님이 인천항에 입국한 이후 본격적으로 복음의 전파와 더불어 찬송가가 한국 땅에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892년 언더우드 선교사님에 의해 ‘찬송가’가 발간된 이래 각 교파별 찬송가가 경쟁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선교사들은 예배를 위해 찬송가를 가르쳤고, 이런 활동은 교회를 통해 서양음악이 보급되고 정착하는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안동에 파송된 선교사들 역시 찬송가와 서양악기를 가지고 입성했을 것입니다. 1910년 안동에 도착한 지휘자 권애라 선교사님, 1914년 안동에서 새로운 사역을 시작한 피아니스트 캐더린 선교사님, 그리고 찬양대 조직에 의욕을 가지고 있던 사은라 선교사님, 찬양대에 남성을 보강하여 4부 화음을 완성한 옥호열 선교사님을 통해 안동 땅에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찬송이 비로소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1928년 1월 20일, 드디어 안동교회에 찬양대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안동교회 찬양대 조직은 인근 지역의 교회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경북북부지역인 안동, 의성, 영주, 풍기, 봉화, 청송, 영양 등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게 했을 것입니다. 작은 풍금을 기증함으로써 안동 땅에 아름다운 선율(旋律)과 함께 찬송이 울려 퍼지게 했을 뿐 아니라 88년 전에 찬양대를 조직하고 틀을 잡는데 헌신하신 선교사님들, 그리고 90년 가까이 동안 찬송으로 하나님께 헌신한 대원들께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날 까지 샬롬·호산나·글로리아·시온·다비다·천사 등 6개 찬양대와 르비딤·새롬·예음·소리엘·꿈나무·새순·비전터 등 7개 찬양단, 그리고 백합·시몬스·꿈나무 등 3개 중창·합창단을 통해 거룩하고 은혜로운 찬송이 울려 퍼지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2016년 8월 11일

김승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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