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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11:08:39 조회 : 722         
여자초등학교 계명학교(啓明學校) 이름 : 김승학   

 

여자초등학교 계명학교(啓明學校)

  

 

“교회 옆에 학교”라는 칼빈의 이념에 따라 안동선교부는 1921년 경안노회 설립 이전부터 교육기관의 설립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이들 학교의 명칭은 학원, 서숙, 학교, 강습회 등이었고 학제 및 교과내용도 다양했습니다. 보통 3년제에서 때로는 5년제로 운영되었습니다. 사실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기독교 학교는 미래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한 장기적인 투자였습니다. 1911년 안동교회에서 설립한 계명학교(啓明學校)는 초등교육기관으로 조선어, 일어, 산수, 성경, 한문, 습자, 도화, 글씨, 작문, 음악 등 과목을 보통 2-3명의 교사가 분담하여 지도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세운 학교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성경을 가르치고 배웠습니다. 특별히 한글을 알지 못해 성경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기독교 학교는 한글을 가르치면서 성경교육을 시켰던 것입니다. 이것은 계몽운동과 신앙운동을 병행되었다는 뜻입니다. 특히 오랜 세월동안 유교 전통 속에서 차별을 받아 오던 경상북도 북부지역 여성들이 참여하게 되면서 교회가 세운 학교의 기능이 더 유용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여성들은 평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사회적 활동에 제약을 받았으며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세운 학교를 통해 여성들의 권리와 문명퇴치, 나아가서 사회참여가 가능해 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안동 읍(邑)에 최초로 세워진 계명학교는 여성교육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충실하게 감당하기 위해 시작한 기독교 학교였던 것입니다.

 

계명학교 설립에 가장 큰 공헌한 분은 1911년 안동에 도착한 권찬영(John Y. Crothers) 선교사님입니다. 그는 다음세대 인재양성에 뜻을 가지고 1911년 5월 계명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특히 여자 어린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계명학교가 개교했을 당시에는 여자들만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계명학교는 안동 읍내 최초의 여자 초등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명학교가 사용한 첫 교사(校舍)는 오월번(Arthur Welbon) 선교사 가정을 위한 임시사택으로 사용하기 위해 법흥동 구 교도소가 있던 위치에 있던 목조와가(瓦家) 가옥이었습니다. 하지만 사택으로 부적당하다고 판단한 안동선교부는 영구 사택을 건축하기로 결정하고 신속히 금곡동 부지를 구입하여 1911년 여름부터 두 동(棟)의 사택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준공이 되지 않은 한 동에 그 해 12월, 오월번 선교사 가정이 이사했습니다. 다른 동은 1912년 5월에 준공되었고 권찬영 선교사 가정의 사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1913년 봄에 다시 두 동을 더 건축하여 사택 4동의 모든 건축이 끝났습니다.

  

1911년 법흥동 선교사 사택을 임시로 계명학교 교사로 사용하면서 학생을 모집하여 수업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금곡동 선교부 동산을 매입하여 선교사 사택을 건축하면서 계명학교로 사용했던 법흥동 목조 가옥을 철거하고 그 자재로 금곡동 선교부 동산 입구에 8칸 목조와가(瓦家) 가옥을 짓고 학교 건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시작부터 계명학교는 당시의 수준에선 초등교육학교의 면모를 갖추게 됩니다. 처음에 여학생만 입학이 가능했던 계명학교는 어느 때 부터인지 남녀공학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남녀 공학으로 바뀐 정확한 연도는 아쉽게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선교부 동산 입구에 8칸 목조와가(瓦家) 가옥은 오랫동안 여학생용 교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후 금곡동에 선교사 사택이 건축되면서 선교사들이 안동에 처음 도착하여 구입한 현재 안동교회 내 존재했던 임시사택을 남학생 교사로 사용하고 남학생도 입학을 허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계명학교는 안동선교부가 처음으로 시작한 오늘의 안동교회 경내로 새 교사를 신축하고 이전하였습니다. 이것 역시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있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당시 장로교 선교회는 선교정책의 일환으로 교육기관을 세우고 초등학교는 당회에서, 중등학교는 노회에서, 대학은 총회에서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따라서 계명학교는 안동선교부에서 설립했지만 안동교회 당회가 관리했으며, 선교정책에 따라 계명학교가 폐교된 뒤에도 안동교회 당회가 그 재산의 소유와 관리를 감당했습니다. 학교를 경영하기 위한 재정은 선교부의 보조와 학교를 세운 교회가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물론 재정의 주된 책임은 학교를 운영하는 주체인 교회에게 있었습니다. 따라서 학교를 세운 교회는 운영하기 위한 재정을 확보해야 했습니다. 선교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계명학교 설립 초기에는 선교부에서 학교운영을 위해 약간의 보조금을 지불했습니다. 하지만 소요된 재정의 거의 대부분을 안동교회가 책임을 지고 있었음을 선교사들의 선교편지에서 알 수 있습니다: “1912~1926년에 안동선교부에 약간의 교육사업 보조금이 지불되었다. 이 같은 선교부의 보조금을 제외하고 교육사업 재정은 거의 한국인 교인들이 지급했다.” 안동교회는 다음세대를 키우는 일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절약하여 적극적으로 투자함으로써 지역사회를 예수 마을로 만들기 위해 교회가 설립된 지 2년도 채 지나지 않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인재양성에 헌신했던 것입니다.

 

계명학교의 학제(學制)는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습니다. 설립 당시 계명학교는 3년제 초등교육기관이었으나 1927년 2월 28일부터는 4년제로, 동년 3월 7일부터는 5학년제로 운영되다가 다시 동년 11월 5일에는 4학년 학급이 재정난을 이유로 폐지되었습니다. 학교는 학생모집에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시행한 방법으로 취학 연령 미달인 어린이들을 무반이라는 별개의 비공식반에 편성하여 국문 및 적응력을 지도한 후 취학연령이 되면 정식으로 입학시켰다고 합니다. 후에 계명학교 교사가 된 장경영의 경우 설립 당시 만 8세로 국문을 해득하고 있었으나 연령 미달자라고 무반에 편성하여 1년 후 1학년에 입학했다고 합니다. 장경영은 졸업하여 후에 계명학교의 교사까지 되었습니다. 교과내용은 조선어, 일어, 산수, 성경, 습자, 도화, 글씨(받아쓰기), 작문, 음악 등이었으며 일반적으로 2~3명의 교사(敎師)가 분담하여 지도하였습니다. 교직원으로는 권찬영 선교사가 가장 오랫동안 교장으로 재직했으며, 한손(Hanson) 선교사와 권챤영 선교사의 부인인 권애라(Ella McClung) 선교사도 번갈아 교장으로 봉사했습니다. 개교할 당시 교사(敎師)로는 이중희 장로와 대구의 기독교학교인 신명학교 출신인 임성례 2인이었습니다. 특히 이중희 장로님은 경북 김천 출신으로 계명학교 교사로 일하기 위해 안동으로 이사 왔는데, 안동의 3·1운동을 모의하다가 검거되어 심한 고문을 당한 후 얻은 병(病)으로 석방된 지 10여일 만에 별세했습니다. 특히 이중희 장로님 가정은 대(代)를 이어 이재삼, 이인홍, 이정일 장로에 이르기 까지 직계(直系)로 계속해서 안동교회의 시무장로로 섬기는 영예를 갖게 되었습니다.

  

계명학교를 위해 수고한 역대(歷代) 교사로는 임학수, 장경영, 김민호, 김득수, 김장옥, 김영규, 원박애, 이권애, 배수철, 김일애, 김복경, 권소악, 송명숙, 김성규, 임상경, 김정모, 이운형, 김원진 제씨였습니다. 평소의 교사 수는 2~3명이었다고 합니다. 교사들은 당시 거의 모든 교과과목을 다 가르쳐야 했을 것입니다. 신월향 집사님은 1922년 영주 연당골에서 출생하여 연당골교회에 출석하고, 영주 평은의 지곡교회에서 1923년 1월 10일 설립한 경신학술원을 다니다가 1932년 겨울 2학년 2학기에 계명학교로 전학했습니다. 당시 계명학교는 4년제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신 집사님이 공부한 2학년 반 학생의 수는 8명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신 집사님이 졸업하기 전 까지 교장 선생님은 권애라 선교사님이었고, 박두영 장로님의 부인인 권소악과 임상경, 그리고 풍기출신 김영규는 교사로 봉직했음을 신 집사님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어 독본은 김성규 장로님이, 일본어는 임상경 장로님이 가르쳤으며, 학생들이 구입해서 사용해야 하는 교과서도 존재하고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보통 점심 식사 후에도 수업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도시락을 준비해서 가지고 갔다는 것입니다. 신 집사님은 1935년 3월 2일, 만 13살 때 졸업했는데 함께 졸업한 여학생 5명, 남학생 3명의 이름을 거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설립 당시에는 일반 공공교육기관인 보통학교가 남학생만 입학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여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려는 의도에서 계명학교가 여학생만 모집했다고 전해집니다. 특히 계명학교는 보통학교에 입학할 수 없는 경제적으로 불우한 학생들에게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으로 설립한 계명학교는 철저히 소외된 아동, 즉 여성과 불우한 학생들을 위한 학교였던 것입니다. 1920년까지 재학생의 수는 총 30~4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남학생의 입학을 허용한 연도에 대한 기록은 없으므로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지만 1913년 선교사 사택이 산 위에 건축되어 선교사들이 그곳으로 입주하게 됨에 따라 임시주택으로 사용했던 가옥을 남학생의 교사로 허용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1913년 이전(以前)으로 추측됩니다. 실제로 선교보고에 따르면 계명학교에는 28명의 소년과 14명의 소녀가, 이듬해 남녀 재학생 모두 31명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안동 읍내의 학교에서는 28명의 소년과 14명의 소녀가 다니고 있었으며, 이듬해 이들 학교의 학생 수는 남녀 모두 31명으로 증가했었다.” 당시 안동 읍내에는 안동교회밖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교보고는 당연히 계명학교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월향 집사님은 당시 안동교회 경내에 존재했던 계명학교의 4년제 학제와 교사(校舍)의 구조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물 정(井)자인 정방형의 구조를 가진 계명학교는 오늘날 돌집 예배당이 서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현재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돌집 예배당 앞의 넓은 터는 학생들을 위한 운동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계명학교의 출입문은 남쪽에 있었습니다. 남쪽의 출입문을 통해 학교로 들어가면 좌측에 교사들을 위한 사무실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다른 교실에 비해 큰 교실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전교생이 함께 모일 때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무실 옆에는 기숙할 수 있는 작은 방이 있었고, 사면(四面)을 돌아가며 학년별 교실이 있었다고 합니다. 중앙에는 작은 정원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대나무가 심겨져 있었답니다. 사면에 있는 교실에는 지붕이 있었지만 이 정원은 지붕이 없었기 때문에 비가 오면 그대로 비를 맞을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 집사님은 때때로 학생이 부족하여 교실이 비어있을 때도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보통 한 반에 여자학생의 수는 10명 미만이었고, 신 집사님이 3학년일 때는 여학생은 5~6명 정도 되었고, 남자는 2~3명쯤 되었다고 합니다. 4학년 때는 5명의 여자학생과 3명의 여자학생이 있었답니다. 주일에 계명학교는 문을 닫았지만, 안동교회에서 다른 용도로 교사(校舍)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신 집사님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계명학교 교사는 비록 안동교회 경내에 있었지만 순수하게 학생들을 위한 용도로만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초등학교는 당회가 책임지고 운영한다는 선교부의 방침에 따라 안동교회는 재정 및 교과 등 모든 것을 책임지고 계명학교를 경영했습니다.

  

하지만 학교 경영을 위한 재정을 마련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당시 교회가 설립된 지 2년여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 자립도 어려운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안동교회는 계명학교 운영에 지혜를 모았던 것 같습니다. 안동교회 교인들의 특별헌금, 생일헌금과 옥동 등에 있던 계명학교 재단 소유의 토지를 임대하여 얻은 수익금 등이 특별회계로 사용되었는데, 설립 초기부터 상당한 기간 동안 학사운영이 공립학교를 능가할 정도도 건실했다고 합니다. 교회가 계명학교를 공적(公的) 기관으로 생각하고 책임 있게 경영했음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계명학교는 개혁적인 학교였습니다. 여자 학생을 위한 학교로 출발했을 뿐 아니라 보통학교 입학을 거부하는 상민(백정)의 자녀 3명이 김익현 장로님의 설득으로 입학하고 졸업함으로써 뿌리 깊은 반상(班常)의 계급타파에 앞장섰습니다. 또한 계명학교는 1919년 3월 18일에 있었던 안동의 만세운동을 위해 교사들과 학생들이 태극기를 제작하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등 애국운동에도 앞장섰습니다.

 

3·1 만세운동이 끝나고 검거 열풍이 불었을 때 태극기를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한 학생들이 너무 어리기 때문에 여론을 무서워한 일경(日警)이 계명학교의 학생들을 검거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실 현재 안동교회가 서 있는 땅은 안동의 3·1 운동이 있게 한 애국운동의 자궁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3·1 운동의 참여는 일경의 감시를 받게 되었고, 그것은 재정난을 가속시켜 학교 경영에 어려움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어떤 기록에도 계명학교의 폐교일자를 찾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재정난과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1937년 전반기까지 꾸준히 성장해 왔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어느 기록에도 계명학교와 관련된 기록을 찾을 없지만 현재 안동교회 주 예배실로 사용하고 있는 돌집 예배당이 준공된 1937년 전후(前後)에 폐교(閉校)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뿐입니다. 신월향 집사님의 증언에 따르면 돌집 예배당의 건축과 함께 자연스럽게 계명학교가 문을 닫게 되었으며, 안동서부교회 이성구 권사님은 당시 3학년에 재학하고 있었지만 학교가 문을 닫았기 때문에 안동보통학교(현 안동초등학교) 3학년으로 전학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따라서 계명학교의 폐교는 현재도 존재하고 있는 돌집 안동교회의 건축과 깊은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1936년 봄부터 시작된 돌집예배당 건축으로 계명학교는 철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동교회 돌집의 위치와 계명학교의 위치는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돌집 예배당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계명학교 교사(校舍)를 철거해만 했을 것입니다. 거의 1년 동안 계속된 건축공사로 인해 계명학교는 문을 닫든지, 혹은 다른 곳에서 수업을 진행해야했을 것입니다. 특히 돌집예배당의 신축은 계명학교의 수업 장소에도 어려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학교의 재정에도 곤란도 초래했을 것입니다. 당시 돌집예배당 신축에 전력투구 해야만 했기 때문에 안동교회에 재정적인 어려움은 찾아왔을 것입니다. 당시 담임인 임학수 목사님은 돌집 예배당 신축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실제로 돌집예배당의 신축에는 선교부, 안동교회 교인들뿐 아니라 안동선교부, 성소병원 의료 선교사들, 그리고 주위 교회들도 돌집 신축에 후원했습니다. 따라서 계명학교는 이전과는 다르게 교회나 선교부로부터 재정적인 후원을 받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 국가가 운영하는 공립학교인 보통학교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교육환경과 내용 등 여러 측면에서 질적인 면에서 향상이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반대로 교회나 그 밖의 기관에서 운영하는 사립학교는 자연스럽게 경영이 힘들어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열악한 교육환경에 놓인 계명학교는 자연스럽게 학생들을 보통학교에 빼앗겼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전력이 있는 계명학교는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었을 것이며, 그 결과 직·간접적으로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어 학교는 여러 면에서 제약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 역시 폐교를 앞당기는 요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신월향 집사도 이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선교 초창기 교회와 학교, 학교와 교회는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학교는 선교의 장이었고, 교회는 학교를 통해 지역사회를 섬기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경안노회 경내 학교를 운영했던 모든 교회들의 공통적인 과제였습니다. 계명학교는 당시 교회가 원활한 소통을 통해 지역사회를 섬김의 사명 뿐 아니라 인재양성이라는 교회의 시대적 사명을 잘 감당한 거룩한 흔적이라고 사료됩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안동교회가 운영한 계명학교는 당시 교육의 대상에서 배제되었던 여학생들과 경제적으로 불우한 학생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교육의 기회를 부여했습니다. 1911년 개교하여 1937년 즈음에 문을 닫을 때 까지 26년 동안 운영된 계명학교에서 적지 않은 기독교 인재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이들은 안동지역의 복음화를 위한 소중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여성만을 위한 초등학교가 지금부터 무려 105년 전에 유림의 본거지인 안동에 존재했다는 것이 신기할 뿐 아니라 자랑스럽습니다.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고, 행동하지 못한 이 사역을 용기 있게 시작하고 무려 26년 동안 지속한 안동교회가 자랑스럽습니다. 교회는 또 다시 오늘의 시대가 요구하는 사명을 찾아야 할 예지(叡智)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시대적 과제를 교회는 다시 용기 있게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화를 앞당겨 안동 땅을 예수 마을로 만드는 지름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2016년 8월 3일

김승학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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