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교회 홈 | 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

2018-11-16 20:44:49 조회 : 490         
안동지역 교회의 첫 여성 지도자​ 이름 : 김승학   

안동지역 교회의 첫 여성 지도자

 

김정숙(金貞淑) 전도사님의 시댁(媤宅)은 한국 기독교 최초의 순교 현장을 목격한 가문으로 전해집니다. 그의 남편 김규립(金奎岦)은 나주김씨로 김규립의 조부(祖父)인 김승걸은 평양에서 한국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년~1866년) 선교사의 순교를 직접 목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866년 8월, 토마스 선교사는 항해사 겸 통역관으로 제너럴 셔먼(General Sheman)호에 탑승하여 대동강으로 올라왔다가 당시 평양감사 박규수에게 붙잡혀 9월 5일 26세로 평양 대동강 변에서 박춘권에 의해 처형을 당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마지막 순간 자신에게 칼을 겨누던 한 병사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전달했는데 그가 바로 박춘권으로, 그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사람(토마스 선교사)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기도)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나에게 받으라 권하였다. 내가 죽이기는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왔노라.” 박춘권은 결국 예수를 믿고 평안도 안주교회에서 오늘날의 안수집사 혹은 장로격인 영수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김정숙의 시조부는 토마스 선교사의 처형 현장 가까이에서 순교당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합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죽어가면서도 평안한 얼굴로 박춘권에게 성경책을 건네주면서 “예수 믿으라”고 한 모습을 그는 잊을 수 없었다고 하면서 당시의 현장을 생생하게 가족들에게 전했다고 합니다. 비록 그는 순교의 현장에 있었지만 예수를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기 시작한 김정숙은 시댁(媤宅)의 구원을 위해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평양에서의 신학공부를 마치고 안동으로 내려온 김정숙은 열정을 갖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마음과 정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 혼자 보리방아를 찧어 아침밥을 했는데, 그가 식사 준비를 다 마치면 맏며느리가 일어나 부엌에 와서 보고는 “벌써 아침식사가 다 됐네”하며 온 식구가 아침을 들었다고 합니다. 식사를 마친 후 온 식구에게 김정숙은 하나님을 믿으라고 날마다 전도했다고 합니다.

  

김정숙 전도사님은 1880년 11월 10일 김병연(金秉淵)의 장녀로 경상북도 풍기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는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정숙한 여인으로 성장했습니다. 김정숙 전도사님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비록 체구는 작았지만 단정하고 고상하며 강직한 성품을 갖고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뿐만 아니라 온화하고 차분하며 자상한 성품으로 주일학교의 어린이들과 청년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칭찬하며 격려하는 어머니와 같은 분이었다고 합니다. 더욱이 그는 자식과 손자 벌 되는 교역자를 존경하고 귀애했다고 김광현 목사님은 기억합니다. 그의 이러한 성품은 지역사회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부인으로, 또한 교회에서는 전도사로서 목회 사역을 빛나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김정숙은 1898년 19세 때 김규립과 결혼했습니다. 김정숙의 시부인 김수업은 성균관 진사에 합격했으나 당시 일본과 러시아 등 열강의 침입으로 인해 정국이 어수선한 1894년, 친척들과 함께 평양에서 풍기 금계리로 이주하여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혼 한 지 8년이 지난 1907년, 28세 때 병에 걸린 남편은 세상을 떠나 혼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슬하에 단 한명의 자녀도 없이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중병(重病)에 걸린 남편을 헌신적으로 간호하면서 마지막 까지 살리려고 했던 김정숙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습니다. 그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잘랐던 열부(烈婦)였습니다. 당시 남편이 괴로워하며 숨을 헐떡거릴 때 약지(藥指)를 끊었습니다. 남편이 약지에서 나오는 피를 먹으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김정숙은 부엌으로 가서 문지방에 약지를 놓고 부엌칼로 내려쳐 쏟아지는 피를 그릇에 받아 남편에게 먹였지만 결국 남편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훗날 평양 여자성경학원에 입학한 김정숙은 선교사님이 피아노 배울 사람은 나오라고 했을 때 나갔지만 피아노 위에 놓은 손가락 중 왼손 넷째 손가락이 없는 것을 본 선교사님이 이 손으로는 피아노를 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피아노 배우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에게 큰 상처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손녀처럼 여겼던 김학준 장로님의 장녀는 자신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할머니가 왼손을 보여주시며 자신이 간절히 원했던 피아노를 배우지 못했다고 하면서 손녀가 가장 먼저 피아노를 배울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아낌없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서라도 남편을 살리려고 했던 김정숙은 남편이 죽자 그 이듬해부터 예수를 믿게 됩니다. 29세인 1908년, 예수를 믿게 된 김정숙은 1911년 당시 안동선교부 선임(先任) 오월번(Arthur G. Welbon)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 믿기로 결심한 그는 거침없는 신앙의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세례 받은 후 1년이 지난 1912년부터 김정숙은 생활의 근거지를 풍기에서 안동으로 옮겨 본격적으로 선교사들의 복음 사역을 도왔습니다. 특히 그는 안동선교부에 속한 선교사들의 조사로 경상북도 북부 지역에 소재한 교회들을 순회(巡廻)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한 안동지역의 여러 교회들은 그를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는 김정숙과 종질이지만 김정숙의 아들과 같은 김학준 장로(안동교회 원로)는 조사(助事)인 김정숙이 손수 짚신을 만들어 싣고 예천, 용궁, 함창, 상주, 문경, 풍기, 순흥, 봉화, 영주, 예안, 영양, 영해, 영덕, 청송, 의성, 비안 등 경상북도 북부지방 거의 전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다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전도하기 위해 시골로 가다가 산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야생동물을 보고는 겁이 나서 나무 뒤에 숨었다가 지나간 뒤에 다시 길을 떠났을 정도로 그는 겁 많은 여인이었지만 사명감에 불타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농민들이 논밭에서 일하는 시간, 비어있는 집에 가서 밥을 해놓고 저녁 때 일터에서 귀가하는 농민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을 정도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다는 것입니다.  

 

안동에서 3년 동안 선교사의 조사(助事)로 활동하던 김정숙은 36세가 되던 해인 1915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심하고 평양으로 출발했습니다. 평양에 있는 여자성경학원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신학수업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시조부는 남편이 죽으니 정신이 돌았다고 하면서 “그냥 두라”고 했다고 합니다. 김정숙이 공부를 마치고 안동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시아버지는 “네가 정신이 돌은 줄 알았는데 집에 돌아와 주어서 고맙다”고 하며 반갑게 맞아 주었다고 합니다. 김정숙은 집안 어른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평양으로 떠났던 것 같습니다. 평양여자성경학원은 1897년 처음으로 단기성경학원으로 시작했는데, 교육기간은 6개월이었습니다. 1907년에는 여교역자 훈련원으로 시작했고, 1910년에는 정식으로 평양여자성경학원이 되어 보다 체계적인 교육을 하게 되었습니다. 1923년에는 미국북장로회 선교부의 설립 허가를 받아 여교역자 양성을 위해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로 개교하였습니다. 1938년에는 평양여자신학원으로 개명되었다가 1943년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장로교에서 세운 여자성경학원은 수업기간이 3년이었고, 교과과정도 성경 뿐 아니라 일반 고등학교와 같이 교양과목도 가르쳐 교역자와 평신도 지도자가 갖추어야할 자질을 갖추게 하였습니다. 공신력 있는 여자성경학원을 1920년 졸업한 김정숙은 안동으로 내려와 교회와 노회를 위해 헌신적인 복음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1922년부터 김정숙 전도사님은 안동의 공식적인 첫 여성 교역자로 안동교회를 섬기면서 교회의 여러 사역에 참여하게 됩니다. 1927년에는 당회의 허락을 받고 소녀회 고문으로 소녀들을 지도하였고, 장로들과 함께 심방을 통해 교인들을 돌보았습니다. 안동교회 당회록에 따르면 김정숙 전도사님을 부인전도사로 청원하고 경안노회는 이를 허락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929년과 1930년에는 교회가 김정숙 전도사에게 사례비를 주지 못할 때 권찬영(權燦永, John Young Crothers) 선교사의 부인인 권애라(Ella McClung) 선교사와 여전도회가 협력해 사례비를 지급했을 정도로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려울 때도 김정숙 전도사님은 인내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복음사역을 감당했을 정도로 불타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교역자로 봉사하던 김정숙 전도사님은 1937년, 15년 동안 섬겼던 안동교회에서 사임함으로써 전도사 직분에서 은퇴했습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58세로 아직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도사 직분에서 은퇴한 것입니다. 그러나 은퇴 후 교역자 직분과 관계없이 평신도로 안동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는 교역자 혹은 평신도 신분과 관계없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거룩한 일이라면 마음과 정성을 다해 동참했던 것입니다. 

 

김정숙 전도사님은 안동지역의 여성 사역에 큰 흔적을 남겼습니다. 경안노회 여전도회 연합회는 안동교회가 중심이 되어 1916년부터는 연중행사로 여도사경회를 개최했습니다. 특히 1922년부터 공식적인 첫 여성 교역자로 안동교회를 섬기게 된 김정숙 전도사님은 안동지역 교회의 여성 자도자로서 리더십을 갖게 됩니다. 특히 그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경안노회에 속한 전역에 다니며 복음을 전한 전도부인(傳道婦人)이었습니다. 1926년 10월 31일부터 일주일 동안 영주 내매교회에서 있었던 여사경회의 강사로, 1927년 5월 3일부터 일주일 동안 지내교회에서 열렸던 부인사경회 강사로, 또한 1929년 3월 5일부터 11일 까지 안동교회에서 열린 종교교육부 주관하는 부인사경회에 김정숙 전도사님이 강사로 섬길 수 있도록 당시 전도사로 시무하던 안동교회 당회가 허락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김정숙 전도사님은 여전도회 연합사업과 활동, 노회의 여성교육에 있어서 중심인물이었습니다.  

 

특히 김정숙 전도사님은 경안여전도회연합회 창립 시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조직적이고 명석한 두뇌를 가진 그는 영적 리더십을 발휘하여 초기 경안노회 여전도회의 안정과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1928년 2월 18일 열린 경안노회 도사경회 중에 대구 주재 박우만(Gerda O. Bergman) 선교사가 내안하여 발기회를 가짐으로써 경안여전도회연합회는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 김정숙 전도사님은 앞장서서 경안연합회 설립의 산파역을 감당했습니다. 당시 발기인으로는 안동 주재 선교사인 권애라, 김정숙 전도사, 김향란, 김정희, 안주봉, 김순애, 권순희, 권순옥씨가 참여했습니다. 발기회를 가진 그 다음날인 1928년 2월 19일,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어 초대회장에 김정숙 전도사님이 피선되었습니다. 김 전도사님은 여전도회연합회 초대부터 5대까지는 회장으로, 6대~13대까지는 부회장으로, 그리고 17대에는 다시 회장으로 섬기면서 초기 경안여전도회 활성화에 큰 헌신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여성의 사역에 혼신의 힘을 다함으로서 경안노회 경내의 여성사역에 초석(礎石)을 놓은 인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1928년 2월 19일 창립된 경안노회 여전도회 연합회 제10회 총회 때 사진은 김정숙 전도사님의 리더십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진에는 당시 경안노회 여전도회를 이끌었던 여성 지도자들의 면면(面面)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연합회 초대 회장으로 수고한 김정숙 전도사님은 둘째 줄 정중앙(正中央)에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당시 경안노회 경내 여성 지도자였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진 아래서 두 번째 줄에는 당시 안동지역에서 헌신했던 4명의 여선교사를 볼 수 있습니다. 여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친 매켄지(梅見施, Rainer J. Mckenzi) 선교사, 권찬영 선교사의 부인으로 창립총회에서 총무로 수고한 권애라 선교사, 일제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된 옥호열(玉鎬烈, Harold Voekel) 선교사의 부인, 안의와(安義窩, James Edward Adams) 선교사의 3남로 당시 안동에서 사역을 감당하고 있던 안두조(安斗照, George Jacob Adams) 선교사의 부인 등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선교사 부인들이 경안여전도회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역대 경안노회 여전도회 회장 명단에는 어떤 여성 선교사의 이름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성 선교사들은 경안여전도회를 위해 전면(前面)에 나서지 않고 배후(背後)에서 헌신했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경안여전도회는 비록 여성 선교사들의 도움은 받았지만 지역출신의 여성들이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여전도회를 이끌어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중심에 김정숙 전도사님이 있었습니다.  

 

특히 김정숙은 일제 압제 하에서도 용기 있게 민족의 편에 선 여성 민족 운동가였습니다. 그는 1919년 3월 18일과 23일에 있었던 안동의 3·1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행동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김정숙, 김병규, 이권애 등은 1911년 안동교회가 설립한 여성 초등학교인 계명학교 3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선교사 임시 사택이었던 가옥에서 3·1만세운동에 필요한 태극기를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시위에 사용할 준비를 주도했습니다. 3·18일 만세시위가 있던 날 김정숙, 김병규, 이권애 등 3명의 여성 지도자들은 옥고(獄苦)를 각오하고 옷고름을 뗀 뒤 단추를 달고 계명학교 여학생 30여명을 인솔하고 만세운동에 참가했으나 당시 여론을 의식한 일제는 김정숙 등 3명은 물론 학생 1명도 구속시키지 못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애국정신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일제 말엽에는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여성 지도자였습니다. 일본제국주의는 황민화정책과 천황숭배를 강화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강요하였습니다. 1935년에는 천주교회가, 1936년에는 감리교회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1938년에는 장로교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습니다. 일제의 극한 박해와 신사참배문제 앞에서 수많은 교회지도자들은 변절과 타협의 길로 갔습니다. 그러나 김정숙 전도사님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죽음도 불사하면서 마지막까지 일제에 저항했습니다. 참고로 경안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인물로는 이원영·강병철·박충락 목사, 권수백·김익현 장로 등 다수 있었지만, 기록으로 남아 있는 여성 교역자로는 김정숙 전도사님이 유일합니다. 그는 죽음도 불사한 각오로 신앙의 정조(貞操)를 지켰던 용기 있는 믿음의 여성이었습니다.  

 

김정숙 전도사님은 1937년 58세로 전도사직에서 은퇴한 후 평신도로 안동교회를 섬겼습니다. 집사와 권찰로 봉사하다가 69세인 1948년에는 권사로 피선되었고, 1952년부터 1955년 까지 여장년부 부장으로 충성을 다했습니다. 1926년 당회록에 의하면 당시 주일학교 교장은 담임인 박상동 목사님이었고, 여장년부 부장은 전도사로 시무하던 김정숙 전도사님이었습니다. 전도사 직을 사임하고도 교회의 여러 곳에서 충성스럽게 섬기던 김정숙 전도사님은 1949년부터 1955년 까지 또 다시 여장년부 부장으로 봉사했음을 안동교회 당회록은 기록합니다. 그는 안동교회 전도사 시무 사역을 내려놓고도 평신도로 돌아가 교회를 섬기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은 어떤 직책이든지 최선을 다한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이었습니다. 그래서 1963년 1월 20일에 열린 당회는 김광현 담임목사님, 김재성·조흥노·이홍구 장로님, 그리고 김정숙 권사님 등이 20년 이상 안동교회를 위해 봉직한 것을 기념하는 예식을 갖기로 결의했습니다. 안동교회는 김정숙의 전도사 사역과 평신도 사역을 남녀 차별 없이 존중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1934년 경안노회 시, 한국선교 50주년 기념식에서 표창을 받은 12명의 20년 이상 시무한 교역자 중 김정숙 전도사님은 유일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한국장로교회 여성 지도자 중에서도 가장 앞선 선각자(先覺者)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김정숙 전도사님은 보신(保身)의 길을 갈 수 있었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일평생 험지(險地)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 믿음의 선배입니다. 32세가 되던 1911년, 그는 안동선교부 선임인 오월번(Arthur G. Welbon) 선교사님에게 세례를 받은 이후 안동에 거주하면서 노회와 교회를 섬기다가 1969년 90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안동교회의 초대 여성 교역자였습니다. 또한 그는 경안노회 여전도회연합회가 설립될 때 산파(産婆)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초기 경북 북부지역의 여성 복음화에 초석을 놓은 여성 지도자였습니다. 특히 김정숙 전도사님은 1919년 3월 18일에 거행된 안동의 3·1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행동하는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이었으며, 일제 말엽에는 일본제국주의 맞서 신사 참배를 거절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애국자였습니다.  

 

그의 강직한 성품과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 그리고 성령 충만한 전도사역은 교회와 노회의 후배들에게 사표(師表)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김정숙 전도사님은 그의 후손이 6대 신앙을 지켜 올 수 있도록 초석을 놓은 신앙의 지주(支柱)요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정숙 전도사님은 조사와 전도사, 전도사 직을 은퇴한 후에도 무려 15년 동안 평신도로서 안동교회의 권찰로, 서리집사로, 여장년부 부장교사로, 또한 주일학교에서 어린이 사역에도 헌신함으로써 자신에게 맡겨진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이요 일꾼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난 이후부터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순간 까지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살다간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김정숙 전도사님의 일생을 회고하면 할수록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한 사도 바울의 육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2018년 11월 15일

김승학목사

  ◁ 이전글   다음글 ▷
목록

Copyright ⓒ 2009 안동교회 All rights reserved.
대표 : 안동교회 / 전화 : 054) 858-2000/2001 / 팩스 : 054) 858-2002  Designed by ando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