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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12 21:05:49 조회 : 1450         
당회록 - 안동교회의 살아있는 역사 이름 : 김승학   
 
당회록 - 안동교회의 살아있는 역사
 
   안동교회 당회록(堂會錄)은 1932년 7월부터 1941년 10월 까지를 제외하고는 원본(原本)모두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안동교회는 1913년 8월 9일 첫 당회로 모였습니다. 20여일 전인 7월 20일 첫 번째 장로가 안수를 받음으로써 당회가 조직되었습니다. 현재 보존하고 있지 않은 당회록은 검사를 받으려고 노회에 가지고 갔다가 분실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안동교회에 경북북부 지역에서 최초 당회가 조직된 이래 초창기 당회록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25 전쟁 이전에 세워진 교회의 대부분은 당회록을 분실했습니다. 그 주된 이유는 6·25 전쟁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는 6·25 전쟁 중에 교회의 귀중한 자료들을 대부분 분실했습니다. 때로는 불타 없어지기고 했고, 때로는 잃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없어진 교회의 자료 중에는 믿음의 선배, 교회 건물, 사진 자료, 유물 등 모두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우리 안동교회는 1930년 대 건축된 돌집 에배당이 전쟁 중에도 고스란히 살아남았습니다. 6·25 전쟁 중에 안동은 잿골, 법석골, 서당골 같은 골짜기를 제외한 온 시가지(市街地)가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거의 85%가 타버렸다고 합니다. 안동교회는 전쟁 기간 동안 인민군과 국군이 야전병원으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교회 경내에 있던 권태엽 기념관과 해방 후 신축한 기숙사와 전도실은 모두 불에 타 버렸고 담임목사 사택도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본당 돌집은 살아남았지만 폭음으로 유리창은 하나도 성한 것이 없었고 돌집 지붕의 슬레이트는 모두 들려져 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당의 외형은 원형 그대로 살아남았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 안동교회 당회록은 거의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우리 교회는 이 귀중한 자료를 거의 처음 것부터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본 교회 제7대 담임인 김광현(金光顯) 목사님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로 목사님의 회고에 따르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공산군이 남쪽을 점령하면서 1950년 7월 29일 안동에도 소개령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원로 목사님은 안동이 점령을 당하더라도 피난을 가지 않고 안동에 머물러 있을 생각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하지만 사전에 충분히 피난할 시간적 여유를 주고 소개할 것을 했고, 또한 모두가 피난을 떠나 예배당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결국 마음을 바꾸어 안동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러 날을 안동에서 지체했기 때문에 급박한 상황에서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떠나기 전 원로 목사님은 책과 의복 등을 헛간에 묻었습니다. 또한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안동을 떠나기 바로 전 소장하고 있던 여러 서적과 안동교회의 당회록을 땅에 묻고 피난을 떠나셨습니다. 이 때 경안노회 회의록도 함께 땅에 묻고 피난 가셨습니다. 교회와 노회의 중요문서를 비닐봉지에 넣어 땅에 파묻고 나서 비로소 원림으로, 원림에서 의성으로, 의성에서 신령으로 발걸음을 떠났던 것입니다. 경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은 교회와 노회역사의 귀중한 자료를 먼저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참고로 제직회의록은 초창기 교회에는 따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당회록에 모든 것을 기록했기 때문에 별도의 명부가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제직회록이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1924년 1월부터입니다. 유아세례교인 명부, 세례교인명부, 학습교인 명부도 초창기 면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그 후 1950년부터 이런 명부들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원로 목사님은 피난을 떠나면서 여러 자료를 가지고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여러 자료를 소지하고 피난을 갔더라면 분실의 가능성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원로 목사님의 슬기로운 판단 덕분으로 교회와 노회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재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때 묻은 책 속에 우리 안동교회의 소중한 역사자료들과 경안노회 노회록이 포함되었습니다. 1950년 8월 30일 안동이 수복되어 원로 목사님은 안두조 선교사와 함께 안동으로 귀환하였습니다. 사택으로 돌아온 목사님은 헛간에 묻어두었던 것들을 파내어 정리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것이 없어졌고, 대부분 상해있었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경안노회록 전부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고 목사님은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회고록에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 교회의 당회록도 목사님이 피난 가시면서 땅에 파묻고 가셨기 때문에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안동교회의 당회록은 안동지역 기독교 역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안동교회 당회록은 안동지역 복음화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0년 초 안동교회의 당회록은 오늘을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문서가 결코 아닙니다. 더욱이 잘 사용하지 않는 한자와 100년 전 사용하던 언어와 표현에 익숙하지 않는 요즘세대와 다음세대는 당회록을 읽고 싶어도 읽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후 세대가 당회록을 읽지 못하는 경우가 초래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우리 안동교회를 방문해 교회와 안동지역의 복음화 역사를 알고자 하는 분들에게 원본을 공개할 때 훼손의 위험도 있고, 번역본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번역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만일 당회록이 읽혀지기도, 또한 접근하기도 어렵다면 안동교회의 역사와 경안노회 경내 교회의 역사는 조만간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는 염려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 당회록을 요즘 언어로 번역하기로 마음을 먹고 2013년 연말당회에 안건으로 상정했습니다. 그 결과 안동교회의 당회는 읽기 어려운 초기 당회록을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문체로 번역하여 당회록을 참고로 하고자 원하는 후대(後代)에게 도움을 주고자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당회록 번역작업에 돌입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조금씩 지연되었습니다. 처음이다 보니 시작할 때 생각했던 계획에 시행착오가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국 당회록 번역작업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번역이 이루어진 당회록은 1913년 7월 20일 조직 당회록에서 1964년 4월까지 입니다. 번역할 당회록은 다음세대가 읽기 힘든 부분에 국한하기로 했는데, 언어나 문체 뿐 아니라 세로쓰기로 되어 있었고, 제7권부터는 오늘날처럼 가로쓰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 안동교회 당회록은 6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권은 1913년 7월 20일 조직당회에서부터 1922년 3월 5일, 제2권은 1922년부터 4월 27일부터 1926년 6월 13일 까지, 제3권은 1926년 8월 11일부터 1932년 6월 5일 까지, 제4권은 분실되었고, 제5권은 1941년 11월 9일부터 1954년 3월 29일 까지, 제6권은 1954년 4월 17일부터 1964년 4월 27일 까지입니다. 특히 두 분의 원로 장로님 임만조·이희학 장로님과 1분의 은퇴 장로님 권정국장로님이 이 번역 작업에 기꺼이 참여해주셨습니다. 권정국 장로님은 제1권, 제3권, 제6권을, 임만조 장로님은 제2권을, 이희학 장로님은 제5권을 번역했습니다. 더욱이 원본을 스캔(scan)하는 작업은 박종대 집사님이 수고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권정국 장로님이 스캔한 원본과 번역본을 정리 정돈하고 편집하는 일을 맡아 수고했습니다.
 
   참고로 안동교회 당회록 제1권의 표지에는 ‘안동읍예수교장로회당회록’라고 쓰여 있습니다. 아래는 1913년 7월 20일에 있었던 조직당회의 기록입니다. 이 때 안동교회 최초로 장로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 결과 당회가 조직되었던 것입니다.
 
一千九百十三년七월二十일쥬일에안동읍례당에남녀교우가모히여례김영옥목가듸모데젼三○一・七과베젼五○一・六절지보고강도고긔도후오월번목셔로회허락을의지하야김병우쟝로쟝닙을광포고김영옥목가쟝로와교우의게문답후오월번김영옥권찬영목들이안수고권찬영씨의긔도로쟝닙야당회를죠직고찬숑가三쟝후오월번씨의축복긔도로페회하다.
 
1913년 7월 20일 주일에 안동읍 예배당에서 남녀 교우들이 모여 예배할 때에 김영옥 목사가 디모데전서 3장 1절-7절과 베드로전서 5장 1절-6절 말씀을 봉독하고 설교를 하고 기도한 후 오월번 목사가 노회의 허락을 의지하여 김병우씨를 장로 장립함을 공포하고 김영옥 목사가 장로와 교우에게 문답한 후 오월번 김영옥 권찬영 목사들이 안수하고 권찬영 목사의 기도로 장로장립하여 당회를 조직하고 찬송가 3장을 부른 후 오월번 목사의 축복기도로 폐회하다.
 
이어서 안동교회의 역사적인 첫 번째 당회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뎨一회 一千九百十三년八月九日안동읍교회뎨일회가오월번목에모히여김영옥목가오월번씨를회장으로공쳔하회장이승좌후시편十五편을랑독고김병우쟝로의긔도로개회다 참석원은목에오월번김영옥쟝로에김병우졔씨더라.본월十四일에문답긔로회중이가결고회당건축기위야수젼위원을형졔십이인과부인십이인기를가결다회장이김영옥씨긔도로페회다. 회쟝 오월번 셔긔 김병우
 
1913년 8월 9일에 안동읍교회 제1회 당회가 오월번 목사 댁에 모여서 김영옥 목사가 오월번 목사를 회장으로 공천하매 회장이 회장석에 앉아 시편 15편을 낭독하고 김병우 장로로 기도케한 후 개회하다. 참석회원은 목사 오월번 김영옥 장로 김병우 제씨더라. 8월 14일에 문답하기로 회중이 가결하고 예배당 건축하기 위하여 수금위원을 남자 12인 여자 12인을 택하기로 가결하다. 회장이 김영옥 목사로 기도하게 한 후 폐회하다. 회장 오월번, 서기 김병우
 
1913년 8월 14일에 있었던 제2회 당회록에는 6인 세례와 3인의 학습을 결의하고 8월 17일 주일 오후 2시에 세례와 함께 성찬을 베풀었는데, 성찬에 참예한 수는 66명이었음을 기록하는 바, 이 때 당회 조직 후 첫 성찬은 김영옥 목사에 의해 집례 되었습니다. 선교사가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인 목사에게 당회조직 후 안동교회 첫 세례식과 성찬식을 집례하게 했습니다. 전 이것이 안동에 주재하고 있던 선교사들의 크나큰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불과 5일 전에 있던 첫 당회의 회장은 오월번 선교사였기 때문입니다.
 
   번역 과정은 3분의 장로님들이 각기 분량을 정해 번역을 한 후 모여서 번역한 것을 상의하고, 번역하기에 어려웠던 것을 의논함으로써 번역의 통일성을 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작업은 그리 쉽지 않았고 처음에는 번역 진도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번역 작업에 참여한 3분의 장로님들이 밝힌 애로점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입니다. 우선 당회록을 기록한 당회 서기(書記)가 계속 교체되었기 때문에 각자가 사용한 필체(筆體)가 서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한 필체에 익숙해지면 번역자들이 곧 바로 다른 문체의 당회록을 만나야했고, 그것은 번역에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서기마다 사용하는 용어가 통일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당회 서기로서 교육도 없이 당회록을 기록했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약간씩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번역자들이 익숙해 질 만하면 사용된 새로운 용어로 인해 번역자들은 곤욕을 치룰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한국교회 초기에는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교사들과 초기 한인 목사들 사이에 조정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또한 과도기에는 용어의 통일성을 기할 수 없었을 것입입니다. 결국 당회록에 기록된 용어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용하는 한자 역시 당회 서기에 따라 서로 달랐습니다. 더욱이 현재 잘 사용하지 않는 한자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번역자들의 번역을 몹시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당회서기는 글씨를 너무 흘림체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판독하기 힘들었습니다. 한글도 아닌 흘림체의 한자는 독해하는 데 어려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난관을 모두 극복하고 작년 연말 모든 번역 작업을 완료하게 되었습니다. 수고해주신 3분의 장로님께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번역이 진행되면서 당회록 원본과 번역서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한 눈에 원본과 번역본을 함께 볼 수 있는 방법을 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책을 펼쳤을 때 원본과 번역본을 대조하고 비교하면서 볼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원본을 스캔하여 오른쪽 페이지에 붙이고, 왼쪽 페이지에 번역본을 붙이면 책을 펼쳤을 때 모두를 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원본의 한 페이지를 그대로 번역본 한 페이지에 옮겨지기 때문에 한 눈에 그 페이지를 확인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래서 번역하고 있는 동안 당회록 원본을 스캔하여 컴퓨터에 저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번역이 완료되었을 때 이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하지만 번역본과 스캔 작업이 모두 끝났어도 위 방법대로 하는 작업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하지만 권정국 장로님의 수고와 헌신 덕분으로 원래 의도한 원본과 번역본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안동교회 당회록 번역본 가본(假本)을 손에 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책을 펼쳐보는 순간 전 감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래 의도한 것보다 훨씬 우수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도 생각하지 않고, 또한 작업하지 않은 전인미답의 100년 역사의 안동교회 당회록 원본과 번역본의 합본을 비로소 발행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초기 당회록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세례와 학습, 그리고 치리(治理)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특히 초기 교회는 엄격한 치리, 권징(勸懲)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결혼예식을 교회법대로 하지 않고서도 회개하지 않았을 때 회개할 때 까지 책벌 아래 두기로 당회는 결정했습니다. 불법으로 청혼했음에도 불구하고 당회에서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무기한 책벌하기로 결정했고, 주류업자에게 점포를 세준 교인을 5개월 동안 책벌하기로 당회는 결정했습니다. 아들이 범죄한 경우 그를 책벌하고 그 아버지는 휴직처벌 뿐 아니라 주일학교 교장직의 사면을 받았습니다. 또한 주일성수를 하지 않을 경우 그 부모를 불러 권면하고 본인이 권면을 듣지 않을 때는 세례교인 자격을 박탈하기도 했습니다. 교인 간에 금전거래에 문제가 생겨 해결되지 않을 때 당회는 당사자들을 불러 수습했습니다. 이처럼 교인 간에 시비가 생기면 불러서 화해가 될 때 까지 계속 불러서 화해시키고 안 되면 책벌했습니다.
 
   안동지역의 모교회인 안동교회의 역사는 곧 경안노회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번역 작업을 통해 그동안 깊게 묻혀 있던 안동지역 복음화의 역사가 밖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요즘 세대도 읽을 수 있는 기록물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소중한 역사 자료가 되었습니다. 또한 100년이 넘은 당회록 원본을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원형 그대로 보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번역자 3분의 장로님과 박집사님의 합력한 작업 기간은 2014년 3월부터 2014년 12월까지입니다. 또한 권당 원본 180쪽으로 번역본을 포함하여 제본하면 권당 360쪽 정도로 이번에 출간되는 당회록는 거의 2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거작(巨作)이 되는 셈입니다. 이 원본과 번역본의 합본(合本)이 1913년부터 당회가 시작된 안동교회의 초기 역사를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안동교회에 관심 있는 사람들, 안동교회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 안동지역의 복음화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안동지역 유일(唯一)의 100년 넘은 교회역사자료를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번 작업으로 완성된 안동교회의 초기 당회록 합본이 한국교회에 작은 공헌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끝으로 다시 한 번 지난 1년 동안 번역작업에 수고해주신 3분 임만조·이희학·권정국 장로님과 원본 스캔 작업에 수고한 박종대 집사님께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2015년 1월 31일
                                                                                              김승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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