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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1 20:47:06 조회 : 507         
7분의 담임목사님을 섬긴 여 집사님​ 이름 : 김승학   

7분의 담임목사님을 섬긴 여 집사님

 

    오늘날도 그렇지만 초기 한국교회는 이름 없이 교회와 교역자를 위해 헌신한 여성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도시든 시골이든 주의 종들을 헌신적으로 섬겼던 여종들을 통해 교회는 조금씩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 시골의 많은 교회들은 상주하는 교역자가 없었습니다. 대부분 토요일 오후에 교회에 도착하여 주일 오전예배와 저녁예배를 인도하고 월요일 아침 교회를 떠났습니다. 형편이 조금 나아 교역자 사택이 있는 교회는 토요일과 주일, 사택에 머무는 교역자를 위해 여종들은 정성껏 식사를 준비해 대접했습니다. 이삼일 머무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잘 증거 할 뿐 아니라 교인들의 심방 등을 위해 미리 연락하고 동행하는 등 여종들은 주일을 준비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사택이 없는 경우, 교역자들은 헌신된 가정에서 머물며 주일을 준비했습니다. 교회를 위해서나 교역자들을 위해서 충성스럽고 헌신적인 여성들의 존재는 오늘의 교회를 있게 한 주춧돌과 같습니다.  

 

   사실 예수님 곁에도 헌신된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여성들을 경시하는 문화에 맞서 예수님은 여성들이 진정으로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눅 13:16). 다른 복음서에 비해 누가복음은 여성에 관해 더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 마리아, 안나, 나인성 과부, 막달라 마리아, 구사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 다른 여러 여자, 법관에게 호소한 과부, 두 렙돈을 드린 과부, 혈루증 여인, 십자가를 따라가며 우는 여자들, 십자가 주변 여자들, 부활을 전한 여자들 등등 아주 많은 여성의 이름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 시대의 여성들은 무시당하고 가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 곁에서 거룩한 구속사역을 도왔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여성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사실 이것은 당시 여성의 지위로 보아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남성과 여성을 당신의 형상으로 평등하게 창조하셨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그의 사역을 돕는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16장은 사도 바울의 선교사역을 도왔던 믿음의 여성인 겐그레아의 집사인 뵈뵈, 동역자로 인정한 브리스길라, 그를 위해 많이 수고한 마리아, 유니아, 자매 사이인 드루배나와 드루보사, 자신의 어머니로 인정한 구레네 시몬의 부인인 마리아 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자유자와 종 사이에 구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동교회에도 이와 같은 믿음과 헌신의 여성들이 존재했습니다. 특히 안동교회 역사에서 김미순 집사님은 담임목사의 사역과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그리고 지역사회를 위해 보통 여성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돕고 헌신한 첫 여성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는 1888년에 출생하여 1948년, 61세로 별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를 미모(美貌)를 지닌 여성이었다고 기억합니다. 비록 오늘의 초등학교인 소(小)학교조차 다니지 못했지만 집에서 글을 배우고 깨우쳐 성경을 읽을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오늘의 안동초등학교인 안동소학교가 1911년에 개교한 것으로 보아 그가 소학교에 입학할 연령이 되었을 당시인 1894~1895년에는 인근에 개교한 소학교가 없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의 집안은 안동이라는 소도시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어느 정도 재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서양문물과 교육에 일찍부터 깨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의 남동생이 서울로 유학을 떠나 보성전문학교(오늘의 고려대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손자인 권영옥 집사님은 김미순 집사님이 약간 급한 성격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급한 성격 때문에 때때로 다혈질적인 모습도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려움에 처해있던 누군가를 돕기 좋아했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금곡동에 위치한 선교사 사택에서 청소와 식사를 돕고 있던 한 집사님이 일제 말엽 탄압으로 선교사들이 강제적으로 철수해 할 일이 없을 때 김미순 집사님은 자기 집으로 그를 불러 집사 일을 시켜 연명할 수 있도록 도왔을 정도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교회의 성도들 중에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자신 소유의 가옥을 증여한 적도 있었다고 손자는 기억합니다. 또한 일제 말엽 종종 집의 광(鑛)에 저장된 벼를 쇠 구루마에 가득 실고 정미소에 가서 찧어 당시 안동교회 담임인 김광현 목사님, 교회의 평신도 리더들과 지역사회의 유지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손자인 권 집사님은 증언합니다. 그 당시 쌀은 몹시 귀했습니다. 하지만 김미순 집사님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사용해 이웃을 돕고 나누는 일에 인색하지 않은 통 큰 믿음과 헌신의 여성이었습니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김미순 집사님은 權(권) 참사(參事) 댁의 자제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참고로 조선시대 말 참사는 정9품의 토관직(土官職)에 해당하는 관직(官職)으로 김 집사님은 지방의 유지 집안으로 시집을 간 것입니다. 하지만 일찍 시부(媤父)와 남편을 잃었습니다. 남편을 잃은 그는 혼자의 몸으로 평생 살았습니다. 손자인 권영옥 집사님에 따르면 김 집사님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예수를 믿었는데, 안동교회 초대 담임 목사로 교회를 섬기던 김영옥 목사님이 시무할 때 교회에 첫 출석을 한 것으로 증언합니다. 그가 안동교회에 첫발을 내딛은 것은 김 목사님이 담임목사로 부임(赴任)한 1911년부터 사임(辭任)한 1920년 말 사이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김 집사님은 초기 안동교회 교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가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교회에 열심을 낸 것은 2대 담임인 이대영 목사님이 부임한 후였습니다. 이 목사님의 권면(勸勉)이 영향을 주었던 것입니다. 이대영 목사님이 안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것은 1921년 2월 5일로, 그는 1년 반 정도 시무하다가 총회로부터 선교사로 부름을 받아 중국 산동성으로 떠났습니다. 비록 1년 반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때 부터 김 집사님은 신앙적으로 이대영 목사님과 각별한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그 때 김 집사님의 나이는 아직 40이 넘지 않은 30대였습니다. 당시 시모(媤母)는 성당에 다녔는데, 교회에 열심을 내는 며느리 김 집사님을 구박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손자인 권영옥 집사님은 1940년 이전, 자신의 나이가 6~7세 정도 되었을 때 조모인 김 집사님이 어린 자신을 깨워 새벽기도회에 함께 갔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는 새벽을 깨우며 기도하면서 교회와 주의 종들을 위해 헌신하던 기도의 여종이었습니다. 그는 하루의 첫 시간에 교회에 나와 기도한 후에 하루를 시작했던 영적인 여성이었던 것입니다. 특히 일제 말엽 여성들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교회에 갔기 때문에 눈만 보여 누군지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 집사님은 얼굴을 드러 내놓고 당당히 예배당을 출입했다고 손자 권 집사님은 기억합니다. 또한 일제 말엽에 일째는 여성들에게 몸 빼 바지를 입으라고 강요했음에도 불구하고 김 집사님은 주일 아침, 몸을 깨끗이 하고 치마를 대려 입은 상태로 예배당 맨 앞으로 나가 치마를 널찍하게 펴고 앉아 예배를 드릴 정도로 담대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일제의 강요에도 자신의 뜻대로 용기 있게 행동한 여성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성격의 김미순 집사님은 일제 말엽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외면(外面)하지 않고 보이지 않게 음(陰)으로 애국하는 일을 돕게 만들었습니다. 손자 권영옥 집사님에 따르면 집에 한지(韓紙) 뭉텅이가 있었는데, 그 한지에는 당시 은밀하게 불려 지던 독립가, 용진가 등이 적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조국을 사랑하는 김 집사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극비리에 진행되고 있던 독립운동에는 자금이 필요했고, 이 일을 위해 김희년 집사님, 김기한 장로님, 이주헌 장로님, 김광현 목사님, 김미순 집사님과 안동 최초의 외과병원을 개업한 백태성 박사도 은밀하게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 중에서 김희년 집사님이 일제에 가장 주목받았는데, 그가 이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일 것으로 권영옥 집사님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현재 교회 정문 앞 도로 건너편에서 삼신사(三神社)라는 기독서점을 경영하고 있던 김희년 집사님은 민족의식이 매우 강했다고 합니다. 김 집사님은 초기 안동지역 교회를 위해 조사(助事)로 헌신한 안동교회 김익현 장로님의 장남으로 삼신사에서는 성경과 기독교 서적 뿐 아니라 당시 민족주의 정신이 강한 새 벗 등의 서적을 판매했습니다. 가끔 김 집사님은 몇 달씩 보이지 않았는데, 일제 경찰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을 것으로 권 집사님은 추측했습니다. 김미순 집사님도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는데, 가끔 이주헌 장로님이 김 집사님 댁으로 와서 신문에 싼 무엇을 가지고 간 것을 권 집사님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이 은밀하게 전달한 독립자금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결혼 후 김미순 집사님은 1남1녀를 두었습니다. 아들의 이름은 권태엽이었고, 딸의 이름은 권복경이었습니다. 권복경은 후에 안동교회 권사로 봉사했습니다. 특히 평양 숭실전문학교 음악과에 재학 중이던 권태엽은 안동에서 영주와 봉화로 갈라지는 예고개에서 차량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때가 1945년 7월 이었습니다. 안타깝게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죽자 김미순 집사님은 안동교회 본당 인 2층 석조예배당 서편에 위치한 오늘의 안동유치원 전면에 목조 함석지붕 4칸 가옥을 건축하여 교회에 기증하게 됩니다. 본당 쪽에서 들어가는 출입문이 있던 이 건물은 권태엽 기념관으로 명명되었습니다. 출입문 옆에는 ‘권태엽 기념관’이라고 쓴 머릿돌이 있었습니다. 권태엽 기념관은 6·25 전쟁으로 파괴되어 완전히 소실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념관의 머릿돌은 6·25로 무너진 후 본당과 안동유치원이 있던 오늘의 100주년 기념관 사이의 등나무 밑에 옮겨 놓았지만 현재 머릿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권태엽 기념관은 건물 동편에 위치한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좌우 양쪽에 방이 한 칸씩 있었고, 중앙에는 작은 뜰, 그리고 정면에 두 칸짜리 큰 방이 있었습니다. 이 권태엽 기념관은 교회의 여러 모임을 위한 유용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는데, 오늘날 교육관과 같은 기능을 하였습니다. 기독청년면려회와 소년면려회의 모임 장소로 사용되었고, 주일에는 주일학교 성경공부를 위한 장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음악도(音樂徒)였던 권태엽은 집에 피아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고 난 후 방치되어 있던 피아노를 안동교회 제7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김광현 목사님이 구입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의 사모인 최의숙 권사님은 일본 전문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했는데, 안동으로 온 이후 이 피아노로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최 권사님으로부터 많은 학생들이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이것은 안동 최초의 피아노 교습실(敎習室)로 알려져 있습니다.  

 

   해방 이후 유아교육의 필요성을 느낀 안동교회는 유치원을 설립할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조기 신앙교육의 필요성이 요청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안동교회는 유치원을 무리하게 단독으로 유치원을 설립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애국부인동지회와 의논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안동교회와 애국부인동지회는 공동 작품으로 안동 최초의 유치원을 설립하기로 뜻이 모아졌습니다. 그 결과 1948년 2월 22일에 열린 안동교회 당회는 안동유치원 설립을 결의했으며, 이에 따라 신속한 개원을 목표로 유치원 설립을 진행하여 4월 10일 개원하게 됩니다. 안동유치원은 사립 유아 교육기관으로는 공식적으로 안동에서 최초였습니다. 안동유치원이 개원되었을 때 김미순 집사님이 아들의 죽음을 추모하며 교회에 기증한 4칸 크기의 건물인 권태엽 기념관을 교사(校舍)로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개원하면서 권태엽 기념관을 유치원 교사로 사용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안동유치원 1회 졸업생인 임무원 장로님의 기억에 의하면 당시 유치원 교실은 안동교회 석조예배당의 하층(下層)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후에는 권태엽 기념관이 유치원 교실로 유용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안동에서 최초로 개원한 안동유치원은 꽃반과 새반, 두개반이 운영되었는데 꽃반은 새반에 비해 한 살 어린 아이들의 반이었습니다. 김미순 집사님이 기증한 건물은 비록 계획한 일은 아니었지만 안동 유아교육의 산실(産室)이 되었던 것입니다.  

 

   안동유치원 설립의 상세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해방된 후 이화여대 출신인 최매지 원장이 치과의사로 안동에 왔습니다. 그가 경영한 3·1 치과의원은 삼산동 우체국 앞에 있었습니다. 최매지 원장은 김미순 집사님 권면으로 안동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지만 처음에는 그리 열심을 보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해방되기 전 투옥된 김광현 목사님은 해방과 함께 석방되었습니다. 석방된 후 처음으로 최매지 원장을 만난 김 목사님은 서먹서먹했지만 김미순 집사님이 중간에서 역할을 잘 해 좋은 관계를 맺게 됩니다. 당시 안동교회 단독으로 유치원 설립을 추진하기에는 힘에 겨웠는데, 이때 김 집사님은 애국부인동지회를 연결하여 공동으로 설립할 수 있도록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최매지 애국부인동지회장과 친교를 가지고 있던 김미순 집사님은 그에게 안동교회의 입장을 설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또한 안동교회에도 애국부인동지회의 의견을 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안동유치원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김미순 집사님은 안동유치원 설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더욱이 그가 기증한 권태엽 기념관의 존재는 안동유치원의 교사걱정을 덜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안동유치원이 개원할 당시 첫 이사장은 안동교회 담임인 김광현 목사님이, 이사로는 당시 애국부인동지회 최매지 회장, 김미순 집사님, 백인원씨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또한 초대 원장은 최매지였으며 이금석씨는 안동유치원 보모로 일했습니다. 안동유치원은 일정한 조직과 체제를 갖춘 상태로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개원한 지 10년 쯤 경과한 후에 애국부인동지회가 안동유치원 운영을 포기함으로써 안동교회가 단독으로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애국부인동지회의 포기 결정이 있는 후 1958년 2월 13일, 안동교회는 제직회를 열고 안동유치원의 단독 운영을 결정했는데, 유치원 이사로 안동교회의 김광현 목사, 김기한 장로, 김학준 장로, 조상만, 조은희, 권복경 제씨를 선출함으로써 안동유치원은 본격적으로 안동교회가 운영하는 정상궤도로 진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후부터 안동교회는 안동유치원을 전적인 책임을 지고 경영해야 하는 거룩한 부담을 갖게 되었습니다.  

 

   김미순 집사님은 교회와 교역자, 그리고 성도를 돕는 섬김의 여종이었습니다. 손자 권영옥 집사님은 가끔 안동교회 김재성 장로님이 김미순 집사님 댁으로 와서 조모인 김 집사님과 대화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권 집사님은 대화의 내용이 교회의 재정에 관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었습니다. 재정적으로 힘이 들 때 교회대표로 김재성 장로님이 김미순 집사님을 만나 의논했던 것입니다. 교회가 어려울 때 마다 김 집사님은 재정적으로 교회를 도왔던 것입니다. 또한 안동에 부흥성회가 있을 때 마다 강사들을 접대하는 일에 앞장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안동에는 외부에서 온 강사들이 머물만한 적당한 숙소가 없었기 때문에 교회 바로 옆에 살고 있던 김 집사님의 법상동 큰 자택에 강사들이 머물렀습니다. 당시 최고의 부흥강사였던 이성봉 목사님이 안동에서 집회를 할 때 안동교회 예배당이 꽉 차 더 이상 교회로 들어갈 수 없는 성도들을 위해 현재 주차장에 서 있던 버드나무에 임시 스피커를 설치했을 정도로 많은 성도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 때 이성봉 목사님은 김 집사님 집에 유했습니다. 또한 신학자이며 철학자요 목회자로 해방 직후부터 30여 년 간 서울대 교수를 역임한 신사훈 박사님이 특강을 위해 안동을 방문했을 때 그 역시 김 집사님 댁에 머물렀습니다. 손자 권영옥 집사님이 목욕물을 끓여 놓은 것을 보고 신 박사님은 “요놈아 애 먹었다”고 자신을 칭찬해주셨다고 권 집사님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김 집사님은 손님을 대접하는 일을 도맡아 감당했던 섬김의 여성이었습니다.  

 

   또한 김광현 목사님이 입법위원이 된 것은 김미순 집사님의 은밀한 도움 덕분일 수도 있다고 손자 권 집사님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안동에 내려와 치과의원을 개업한 최매지 원장은 당시 애국부인동지회 회장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최매지 원장은 김미순 집사님의 권면으로 안동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그 후 김 목사님과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당시 전국적으로 활동을 하던 여성 지도자인 김활란 여사와 임영신 여사 등이 안동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안동의 특산물인 안동포, 삼베, 모시를 전하며 김 집사님은 김광현 목사님을 소개했다고 합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당시 33세로 비교적 젊은 김광현 목사님은 중앙 정치권에 소개되었고, 이것은 김 목사님이 안동지역 입법위원이 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손자 권 집사님은 추측하고 있었습니다. 김미순 집사님은 교회에 필요한 것이라면 주저 없이, 그러나 조용히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기 전인 1948년 어느 날, 김 집사님은 안동교회 예배당 하단 강대상을 하나님께 드리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목수인 김명인 집사님에게 부탁을 했는데, 완성되기 전 김 집사님은 영덕에서 조난 사고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후 완성된 후 강대상에는 이준복 장로님이 쓴 ‘김미순 집사 유족 일동’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 강대상은 1980년 어느 날 시골 교회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뜻밖의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1948년 9월 28일~30일 제 45회 경안노회가 영덕읍 교회에서 개회되었습니다. 이 때 노회는 수양회를 겸하여 회집되었습니다. 여느 노회와는 다른 특별한 노회였던 것입니다. 안동교회 제2대 담임으로 섬기다가 총회의 부름을 받고 1922년 중국에 선교사로 떠났던 이대영 목사님이 강사로 참여하는 뜻 깊은 노회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김미순 집사님은 이대영 목사님의 권면으로 교회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61세인 김미순 집사님이 멀리 떨어진 영덕 까지 가는 것은 무리였지만 이대영 목사님과의 특별한 관계로 몇 명의 교인과 함께 수양회에 참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노회 마지막 날인 1948년 9월 30일, 강구교회로 옮겨 집회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집회를 마치고 바다로 나가 배를 탔다가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4명이 조난을 당했습니다. 이 때 2명의 목사님과 풍기교회의 여전도사님, 그리고 김미순 집사님이 세상을 떠나는 참사를 당했습니다. 안동교회의 교인들은 새벽기도회 마치고 사고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영덕에 있던 노회원들 뿐 아니라 참사소식을 들은 안동의 교인들은 비통에 빠졌습니다. 당시 단기 경안성경학원 원장이었던 조운선(Olga C. Johnson) 선교사님은 김미순 집사님의 시신(屍身)을 가지고 안동에 돌아왔습니다. 독녀인 권복경 권사님과 친지들, 그리고 교인들은 장례를 의논하여 안동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교회 마당에서 슬픔 가운데 장례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안동교회와 지역사회는 믿음의 여걸, 헌신의 여종을 너무도 갑작스럽게 잃게 된 것입니다.  

 

   김미순 집사님은 안동교회가 설립된 초기부터 출석한 초대교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안동교회에 출석하고 세상을 떠나기 전 까지 30여 년 동안 초대 담임인 김영옥 목사님으로부터 7대 담임인 김광현 목사님 까지 7분의 주의 종들을 한결 같은 마음으로 섬긴 충성스러운 여종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마음을 정한 이후 단 한 번도 하나님을 멀리 하거나 하나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멀리 하거나 떠나지 않고 교회를 지키고 하나님의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위해 조용히 바쳤습니다. 그의 회심은 교회와 지역사회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여성이었지만 그는 교회적으로 사회적으로 선(善)한 영향력을 끼쳤던 시대를 앞서가는 봉사자였습니다. 김 집사님은 소유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움켜쥐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올바로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물질관은 하나님의 사업과 교회, 그리고 민족과 지역사회를 위해 아낌없이 내놓은 멋있는 여성이었습니다. 손자인 권영옥 집사님은 조모인 김미순 집사님을 영원히 잊지 못합니다. 그는 김 집사님을 자신의 유일한 영적 어머니, 유일한 영적 지주(支柱), 유일한 정신적 지주로 고백했습니다. 한결 같은 마음으로 교회, 하나님의 종, 국가와 민족을 섬긴 김미순 집사님이 남긴 거룩한 흔적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글을 마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경적 물질관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김미순 집사님이 꼭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일까?”  

 

2018년 10월 21일

김승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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