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교회 홈 | 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

2017-01-29 17:51:28 조회 : 1266         
안동에서 순교한 선교 삼총사 이름 : 김승학   

안동에서 순교한 선교 삼총사

 

대구에서 안동까지의 거리는 무려 120Km나 되는 원거리이기 때문에 경북 북부지방의 선교를 원할히 하기 위해 1908년 8월 미국북장로회 선교회 정기 총회 이후 부산에서 열린 한국선교 집행위원회는 오월번 선교사와 그의 부인인 새디(Sadie Welbon), 그리고 의사인 별의추(Archibald G. Fletcher) 박사에게 안동에 새로운 지부 개설을 요청했고 이들이 동의함으로써 1908년, 안동선교부가 개설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1908년 대구선교부에 주재하던 사우대(Chase Cranford Sawtell, 史佑大) 선교사는 안동 주재 초대 선교사로 부임하게 됩니다. 그 해 12월 1일 사우대 선교사는 대구를 출발하여 안동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신장이 180Cm로 장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다재다능한 그는 사택이나 건물에 기계적 문제가 있으면 거뜬히 해결했고, 동산병원에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작은 풍차를 만들어 만물박사로 통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경북북부 지방을 예수 마을로 만들기 위한 거룩한 꿈을 갖고 안동 선교부에 도착한 사우대 선교사는 선교사가 임시로 거처할 주택 한 채를 구입했습니다. 선교사들이 거주한 안동 선교부 최초의 가옥은 현재 안동교회 부지 안에 위치하는데 지난 2009년 7월 철거된 안동교회 교육관 터가 바로 그 자리입니다. 다시 말해 현재 안동교회가 서 있는 터는 안동선교부가 시작한 곳입니다. 즉 안동교회의 현재 부지는 안동선교의 시발점, 근원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 터는 100년 동안 안동선교의 중심이 되어 왔습니다.

 

 사우대 선교사가 안동 선교부로 부임하고, 1909년 9월 강원도 원주가 감리교 구역으로 확정이 되어 원주에서 사역하던 미국 장로교의 오월번(Arthur G. Welbon, 吳越番) 선교사가 안동으로 이사함으로써 본격적인 안동 땅의 선교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오월번 선교사는 원주에서 자신과 동역하던 김영옥 조사와 함께 안동으로 내려오게 되었는데, 김영옥 조사는 자신의 사역에 헌신하면서도 1911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안수 받은 후 경상북도 북부지역 한국인 최초의 목사가 되어 안동교회 초대목사로 부임했습니다. 또한 별의추(Archibald G. Fletcher, 鷲義湫) 의료 선교사가 안동으로 이주하여 동역함으로써 안동 선교부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우대 선교사, 오월번 선교사, 그리고 별의추 선교사의 부임 결과 안동선교부는 3명의 선교사를 갖추게 되어 공식적인 선교부로 출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별의추 선교사의 안동 부임은 안동을 포함한 경북북부지역의 의료선교를 가능케 한 안동성소병원의 탄생을 가져왔습니다. 참고로 1909년 10월에 개원한 안동성소병원은 오늘까지 지난 108년 동안 경북북부지방의 영육(靈肉)의 구원을 위한 거룩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안동 읍(邑)에 교회가 좀처럼 세워지지 않자 선교부의 활동이 위축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09년 8월 두 번째 주일(8월 8일)에 8명이 모여 감격스러운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안동교회가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안동 읍 최초의 교회인 안동교회는 선교사가 주도적으로 세운 교회가 아니라 선교사들의 복음을 수용한 안동의 자생적(自生的)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입니다. 간절히 기다리던 안동교회의 설립은 안동 선교부에도 큰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원주에서 이주한 오월번 선교사와 조사인 김영옥은 안동교회의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안동교회가 첫 예배를 드린 후 불과 1년이 지나지 않아 회중의 수가 무려 75여명이 되어 예배처소로 사용된 5칸 기독서원은 비좁아 더 이상 예배를 드릴 수 없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의 임시주택에서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동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비약적인 부흥을 경험하였고, 특히 안동교회의 설립과 부흥은 선교사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특히 안동교회의 설립은 안동선교부가 침체를 벗어나 전도에 활기를 불어 넣게 되었습니다. 즉 안동교회의 부흥은 선교사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1909년 9월부터 사우대 선교사와 오월번 선교사는 전도구역을 분할하여 북쪽은 사우대 선교사가, 서쪽은 오월번 선교사가 책임지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길을 떠난 지 10일 만에 사우대 선교사는 장티푸스에 걸려 열병이 심했습니다. 사우대 선교사는 선교 후원금을 아끼려고 가마 타는 것을 거부하며 조랑말을 타고 대구까지 갔습니다. 비록 대구로 가는 도중 그는 두 번이나 말에서 떨어지는 곤경을 당했지만 대구까지 가는 길을 잘 버텼습니다. 처음에 사우대 선교사의 병(病)은 중한 것이 아니었지만 별세하기 이틀 전부터 심각한 상태가 되어 안타깝게도 1909년 11월 16일, 28세라는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우대 선교사는 안동선교에 기록된 최초의 순교자였습니다. 아내인 맥클렁(Katherine M. McClung) 선교사는 남편 사우대 선교사 묘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새겼습니다.

  

체이스 크랜포드 소텔

1881년 1월 9일 출생

1909년 11월 16일 별세

“나는 그들을(조선인을) 사랑하겠노라(I am going to love them)”

  

사실 “나는 그들을(조선인을) 사랑하겠노라”는 묘비에 적힌 글은 사우대 선교사의 신학교 동창인 레이놀즈(Walt H. Reynolds)가 남긴 말이었습니다. 사우대 선교사는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에 가서도 조선을 사랑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조선을 사랑했기 때문에 내한(來韓)했고, 조선과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나라(天國)로 간 것입니다. 사우대 선교사는 안동 땅에 순교의 피를 뿌린 최초의 순교자였습니다. 안동 선교는 이처럼 피를 흘림으로써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동선교부의 초대 선교사로 부임한 사우대 선교사가 1909년 11월 16일 장티푸스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자 안동 선교부의 정상적인 선교활동은 다소 지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욕적으로 복음전파가 시작되었지만 사탄의 일격을 당한 안동선교부의 활동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동지역의 선교는 결코 지체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순교의 피가 뿌려진 지 2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1910년 1월, 권찬영(John Y. Crothers, 權燦永) 선교사가 안동에 부임함으로써 안동선교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사우대 선교사와 권찬영 선교사는 동서(同壻) 사이로 권찬영 선교사는 사우대 선교사 부인의 언니인 엘렌 맥클렁(Ellen M. McClung)의 남편이었습니다. 또한 권찬영 선교사는 사우대 선교사가 졸업한 미국 오하마 장로교 신학교 동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안동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로 안동에서의 구원사역은 큰 단절 없이 계속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권찬영 선교사는 1952년 은퇴하기 전까지 40여 년 동안 안동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해 Mr. 안동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안동을 사랑했고, 지역사회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한 몸에 받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사우대 선교사가 안동에 부임한 후 1년도 넘기지 못하고 순교함으로써 중단될 위험에 빠져있던 복음사역이 권찬영 선교사의 부임과 함께 계속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동서지간인 사우대 선교사와 권찬영 선교사는 서로 합력하여 안동 땅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이루어 가는 거룩한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안동 땅에서 두 번째로 순교의 피를 흘린 선교사는 인노절(Roger Earl Winn)입니다. 인노절 선교사는 1882년 미국 일리노이 주(州)에서 출생하고 캔자스로 이사해 시카고에 있는 맥코믹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안동교회가 설립된 해인 1909년 미국 북장로교 파송선교사로 부산으로 왔습니다. 그는 부산과 밀양 등 경남 일원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선교지 분할 정책에 따라 부산은 호주장로교가 맡았기 때문에 1914년 인노절 선교사는 경북 지방으로 선교지를 옮기게 됩니다. 안동으로 부임한 인노절 선교사의 주된 사역은 체계적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인노절 선교사가 안동에 부임하기 전인 1912년부터 안동에는 여자성경학교를 세워 여성 지도자를 양성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노절 선교사의 부임 이후 보다 체계적이고 확대된 성경학교를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1920년 여자성경학교는 남녀 성경학교로 확대 개편 되었습니다. 이 때 인노절 선교사는 이 성경학교의 교장이었고, 당시 안동선교부에서 동역(同役)하던 권찬영(John Y. Crothers) · 안대선(Wallace J. Anderson, 安大善) 선교사는 교사였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은 서로 고유의 역할을 갖고 있었습니다. 특히 안동의 기독교를 흔히 학자들이 ‘성경 기독교’라고 말하는 데는 아마 1912년부터 시작된 성경학교의 공(功)이 큰 것 같습니다. 선교사들은 기독교 경전(經典)인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대로 살 것을 가르쳤고, 당시 유교의 경전을 배우고 경전대로 살던 안동 사람들은 성경을 비교적 쉽게 수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안동인의 정서(情緖)와 초기 선교사들이 지향한 성경공부가 절묘하게 일치해 안동에 복음이 순조롭게 정착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안동의 남녀성경학교를 위해 헌신한 인노절 선교사의 공(功)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노절 선교사는 남녀성경학교가 문(門)을 연 후 2년이 지난 1922년 이질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인노절 선교사의 묘비에 적힌 글입니다. “He is not dead but sleepeth.” 그렇습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단지 주님의 다시 오실 때 까지 잠자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안동에서 만 8년 동안 성경을 가르치며 말씀을 통한 제자양육사역에 집중하다가 그의 나이 40세에 천국에 입성했습니다. 안동 땅의 첫 번째 순교자가 나온 지 13년 만이었습니다. 인노절 선교사는 초기 안동기독교의 순교 3총사 중 두 번째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인노절 선교사가 별세한 후 그의 부인인 캐더린(Catherine) 선교사는 안동을 떠나 평양에서 평양신학교 강사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거기서 3년을 머물다가 미국으로 귀국하게 됩니다. 이 때 안동의 교회들은 인노절 선교사를 기억하며 성경학교 건물을 건축할 계획을 세우고 모금운동을 하고 있었고, 이 소식을 들은 인노절 선교사의 부인인 캐더린 선교사는 미국교회와 친지들로부터 모금해 안동으로 돌아와 성경학교를 신축하였습니다. 1925년 준공된 이 성경학교의 이름은 ‘인노절 선교사 기념 성경학교’라고 명명(命名)되었습니다. 이 성경학교는 1948년 ‘경안고등성경학교’로 바뀌었고, 후에는 ‘경안신학원’으로 개명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2005년 3월 10일 개교한 경북 북부 지역의 유일한 대학원 대학교인 ‘경안신학대학원 대학교’의 모체(母體)가 되었습니다.

  

안동의 세 번째 순교자인 오월번(Arthur G. Welbon)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로부터 파송받아 1900년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1866년 미시간 주(州)에서 출생했으며, 맥칼스터(Macalester) 대학교를 졸업한 후 1900년 샌 안셀모 신학교(San Anselmo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했습니다. 그 해 10월 목사 안수를 받고 한국에 선교사로 입국했습니다. 그는 새디 선교사와 1901년 서울에서 결혼했습니다. 오월번 선교사는 서울, 경기도, 강원도, 경북, 평양 등 여러 지역에서 복음 전파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안동지역에서 뚜렷한 선교의 족적을 남겼습니다. 1908년 8월 미국 북장로회 선교회 정기총회 이후 부산에서 열린 한국 선교 집행위원회는 오월번 선교사를 안동선교부에 파송하기로 결정했고, 이에 따라 오월번 선교사 가족은 1910년 2월 원주에서 안동으로 이사하여 안동지역 교회 개척과 목회 등 초기 안동지역의 복음화에 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특히 오월번 선교사의 주된 사역은 평신도 양육으로 초기 안동지역의 교회가 말씀에 기초해 든든히 세워질 수 있게 했습니다. 오월번 선교사의 부인인 새디(Sadie Welbon) 선교사가 남긴 다이어리(Diary)는 1909년 8월 둘째 주일(8일) 안동교회 첫 예배 참석자 중 리더를 제외한 7명 모두 세례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년이 지난 1910년 여름, 75명이나 모이는 교회로 계속 성장했음을 밝힙니다. 1910년 6월 16일에는 여자 성도를 위한 첫 번째 성경공부 모임이 있었는데 75명 이상이 참석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밝힘으로써 당시 성경공부를 통한 제자양육이 오월번 선교사 부부의 중요한 사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여성을 위해 매주 목요일마다 부인성경공부반이 열렸는데 첫 번째 모임에 무려 75명이 모였지만 진심으로 성경공부를 원하는 사람만을 추려낸 결과 25명으로 한 반을 구성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후에도 여성성경공부반은 일주일에 두 번씩 오월번 선교사 사택에서 모여 새디 선교사가 월요일에는 젊은 여성반, 목요일에는 중년 여성반을 인도하였습니다. 오월번 선교사 부부는 안동지역 교회들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세워질 수 있도록 평신도를 양육하는 일에 매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의 훈련을 통해 초기 안동지역 선교는 뿌리를 내리고 부흥의 날을 기약할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월번 선교사는 안동선교부가 선교 부지를 구입하고 선교사를 위한 사택을 건축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안동에 도착한 선교사들이 구입했던 임시사택은 선교사들이 생활하기에 불편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사용할 수 없었고, 따라서 선교사를 위한 사택 건축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당시 안동선교부의 주임 선교사였던 오월번 선교사는 선교사들이 거주할 주택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기초 작업에 착수하게 됩니다. 안동에 체류하고 있던 존슨(Woodbridge O. Johnson, 張仁車) 의료선교사가 오월번 선교사에게 1910년 11월 26일 쓴 편지에 의하면 낙동강이 보이는 동산기슭 앞에 100 야드 정도의 새로운 선교센터 부지가 잘 부서진 화강암 토질이고 배수도 매우 좋았다고 합니다. 이곳은 오늘의 금곡동 산기슭으로, 1910년 말부터 선교사 사택을 위한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910년 10월 24일 선교센터를 세울 대지를 구획하고 땅 고르기(grading) 작업을 시작했는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선교부지 동산은 화강암과 모래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지 작업에 공사비가 많이 소요되지 않았고, 작업이 마쳤을 때 안동의 서쪽 끝에 좋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오월번 선교사는 선교사 사택에 필요한 목재를 구하기 위해 낙동강 상류로 80리 길을 3일 동안 집을 떠나야 하는 수고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선교사 사택 건축을 위해 25명의 일꾼이 함께 일했지만 작업이 너무 더디게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오월번 선교사의 헌신으로 네 채의 선교사 주택이 결국 준공되었습니다. 참고로 이 때 준공된 사택은 안타깝게도 단 한 채도 현재 남아있지 않습니다.

  

더욱이 안동교회 초대 동사(同使) 목사였던 오월번 선교사는 안동교회의 첫 번째, 두 번째 예배당 건축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마 그는 안동교회 첫 예배당 건축을 계획하고 공사하는 일에도 직·간접적으로 참여했을 것입니다. 안동교회는 첫 예배를 드린 지 1년 만에 무려 75명이 모임에 따라 예배당 신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대지를 구입하고 공사를 시작한 후 약 한 달 남짓 만에 16칸 ‘ㄱ’자 예배당 건축을 끝냈습니다. 교인들은 자신의 첫 예배당을 건축하기 위해 정성껏 헌금했고, 그 결과 9월 말 첫 삽을 뜬지 1개월 후인 10월 30일, 즉 10월 마지막 주일에 감격의 입당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16칸 예배당은 약 30평 정도로 결코 작지 않는 규모였습니다. 공사비에 관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건축비를 알 수는 없지만 선교사들이나 교인들의 헌신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새디 선교사가 1910년 10월 25일 쓴 편지에 따르면 신축한 ‘ㄱ’자 예배당에는 무려 450명 정도가 앉을 수 있었고, 아직 바닥이 깔리지 않은 상태에서 흙바닥에 자리를 깔고 예배를 드렸으며 곧 다가올 겨울을 위해 난로를 준비함으로써 성도들을 위한 각별한 배려는 있었습니다. 8x8 피트를 한 칸으로 하는 16칸 예배당은 당시로는 작지 않은 공간인 약 30평 규모로 최대 400여명이 앉을 수 있었다는 새디 선교사의 기록은 과장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예배당의 준공은 안동교회를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했으며, 더욱이 안동지역 교회들의 평신도 지도자를 훈련시키는 유용한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안동교회의 두 번째 신축예배당은 1913년 11월에 공사를 착수하여 1914년 2월에 준공되었습니다. 당시 김영옥 목사가 안동교회의 담임목사였지만 오월번 선교사는 동사목사로 서로 교대로 당회장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때도 오월번 선교사는 두 번째 예배당 신축공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1913년 8월 9일 개회된 안동교회 제1회 당회에 따르면 당회장은 오월번 선교사였으며, 예배당을 신축하기 위해 남자 12인, 여자 12일의 수금위원을 두기로 결의했습니다. 공사가 겨울에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공사는 빠르게 진행되어 이듬해인 1914년 봄이 되기 전에 공사는 완료되었습니다. 참고로 이곳은 지금의 100주년 기념관이 서 있는 위치입니다. 그 결과 1914년 봄에 안동교회는 ‘ㄱ'자 예배당에서 새로 준공한 예배당으로 이사할 수 있었습니다. 목조 함석지붕 2층 예배당은 길이 40-50척 크기의 비교적 큰 규모의 건축물이었고, 평소 주일예배 시 300~4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당시 이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린 경험이 있는 분들에 따르면 최대 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고 합니다. 안동교회의 두 번째 예배당은 안동지역에 산재한 교회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전 까지는 생각도 하지 못한 대형집회를 가능하게 했으며, 그 결과 교사교육대회 및 부흥사경회를 통해 안동지역 교회들의 부흥을 가능하게 했던 것입니다.

  

또한 오월번 선교사는 안동교회 당회 조직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11년 가을 경북노회에서 안수를 받은 김영옥 목사는 안수 후 곧 바로 안동교회 초대 목사로 부임하였습니다. 그의 부임이후 2년이 지난 1913년 7월 20일, 당회는 장로장립을 결의하고 안동지역 최초로 김병우씨가 장립함으로써 안동교회는 경안지역에서 최초로 당회가 조직되었습니다. 당회 조직을 마치고 1913년 8월 14일, 안동교회는 두 번째 당회에서 6명에게 세례를, 3명에게는 학습을 주기로 결의하고 다음 주일인 8월 17일 성례를 베풀었습니다. 이 때 당회장은 오월번 선교사였습니다. 교회가 설립된 후 당회가 조직되기 전 까지 세례와 성찬은 오직 선교사에 의해 베풀어졌지만 1913년 8월 17일 오후 2시 당회 조직 후 첫 성례전에서 설교와 세례, 성찬 중 떡을 나눈 사람은 한국인 김영옥 담임목사, 포도즙은 오월번 선교사가 베풀었고, 성찬예식이 마쳤을 때 김영옥 목사가 축복기도를 한 후 폐회되었습니다. 이처럼 안동교회는 담임인 한국인 목사와 동사목사인 선교사가 서로 동역하는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오월번 선교사는 당시 조사(助師)인 김익현, 엄응삼, 김성삼, 김인옥, 권수백, 장사성, 권중한, 임학수 등과 함께 초기 안동지역 복음화에 주춧돌을 놓은 위대한 주의 종입니다. 1912년 3월 경상노회록에 따르면 오월번 선교사의 사역지는 안동 서북지역, 영양 서부지역, 봉화, 순흥. 풍기, 예천, 문경, 함창, 상주 북부지역, 영주 등으로 거의 경상북도 북부지역 전역을 포함할 전도로 광범위했습니다. 특히 그의 순행에 관한 문헌은 당시 예배, 학습, 세례, 성찬 등을 볼 수 있게 합니다. 그는 안동지역 여러 교회들의 동사목사로 사역하면서 교회의 기초를 든든히 세우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또한 한국어 연구 감독, 조사(助師)와 성경 판매원인 권서들을 감독하는 업무 등을 수행했습니다. 그는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으며, 얼굴이 검은 수염으로 뒤 덥혀 야성적인 인상을 주었고, 교인들과 접촉은 많지 않았지만 선교동산이 있는 금곡동에 우물을 파 주민들의 식수(食水) 해결을 해 주는 등 속 정(精)이 많은 선교사였습니다. 특히 그는 안동에 최초로 사과나무를 보급한 선교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오월번 선교사는 1917년 평양 선교부로 이임하여 순회전도와 계몽교육에 힘쓰다가 1919년 부인인 새디 선교사의 건강악화로 인해 미국으로 귀국했다가 1922년 다시 안동지역으로 돌아와 중단 없이 선교사역을 감당했는데, 1922년 1월 경북노회로부터 분립된 경안노회를 위해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아 수고했습니다.

  

미국에서 안동으로 다시 돌아온 오월번 선교사는 사역에 힘쓰다가 6년이 지난 1928년 4월 6일, 61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의 병명은 장티푸스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안동의 첫 순교자인 사우대 선교사의 병명(病名)도 장티푸스였습니다. 사우대 선교사와 오월번 선교사는 1908년 설립된 안동선교부의 첫 선교사들입니다. 그들은 경북 북부지역 선교를 위해 안동으로 왔고, 선교를 위한 동역자였습니다. 그런데 사우대 선교사가 장티푸스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지 19년 지난 1928년 4월, 사우대 선교사와 똑같은 풍토병인 장티푸스로 오월번 선교사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1903년 먼저 세상을 떠난 장남 토마스(Thomas Harvey)와 역시 1912년 먼저 세상을 떠난 딸 앨리스(Alice)와 함께 양화진 묘역에 묻혔습니다. 한 가정에서 영광스럽게도 3명의 순교자가 나온 것입니다.

  

어찌 이들의 죽음이 우연이겠습니까? 이들의 순교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순교의 피를 먹고 자랍니다. 그러나 복음이 척박한 안동 땅에 안동선교부가 세워진 1년 만인 1909년 사우대 선교사의 순교를 시작으로 피가 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안동이 거룩한 땅으로 변화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입니다. 그 후 12년이 지난 1922년, 인노절 선교사의 죽음은 안동 땅을 복음의 땅으로 만든 거룩한 비료가 되게 했습니다. 순교한 인노절 선교사의 자리에 다시 복귀한 오월번 선교사는 경안노회 지역의 교회들을 든든히 세우기 위해 헌신하다가 1928년, 19년 전 안동 땅에서 함께 동역하던 사우대 선교사와 동일한 풍토병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순교 3총사인 사우대 선교사, 인노절 선교사, 그리고 오월번 선교사의 거룩한 죽음은 불교, 유교, 그리고 샤머니즘으로 견고한 안동을 거룩한 땅으로 변화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들 선교 3총사가 순교를 통해 흘린 거룩한 피는 안동 땅에 영혼구원을 위한 영적 비료가 되어 골골마다 교회들이 세워지고 성장하게 하여 오늘날 안동의 복음화가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들을 한반도의 동남쪽 오지(奧地)인 안동 땅으로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한반도의 변두리 지역인 안동에서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다가 아낌없이 생명을 바친 순교 3총사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동 땅의 교회들은 이들의 이름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아니 잊어서도 안 됩니다. 안동 땅의 모든 교회들은 순교 3총사의 거룩한 삶을 기억하고 교회에게 주어진 선교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2017년 1월 28일

김승학 목사

 

  ◁ 이전글   다음글 ▷
목록

Copyright ⓒ 2009 안동교회 All rights reserved.
대표 : 안동교회 / 전화 : 054) 858-2000/2001 / 팩스 : 054) 858-2002  Designed by ando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