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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3 08:34:43 조회 : 868         
안동의 첫 한국인 목사, 김영옥(金泳玉)​​ 이름 : 김승학   

안동의 첫 한국인 목사, 김영옥(金泳玉)

 

 안동의 첫 한국인 목사님은 김영옥입니다. 목사님은 1871년 4월 12일 황해도 연백군에서 출생했습니다. 가난했던 그는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미국 하와이로 갈 꿈을 갖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8세가 되던 1888년 어느 날, 평산 누님 댁에 갔다가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였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선교사님을 만나 세례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김영옥 목사님의 손자인 김형태 목사님(서울 연동교회 원로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증경총회장)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1888년 너무나 빈한하고 힘든 생활에서 벗어나 보고자 할아버님은 평산 누님 댁에 갔다가 리승만(할아버님 보다 2세 연하) 씨를 만나 상의하고 마침 황해도 장연 솔래(松川) 교회에 미국 선교사가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는데, 이것이 그의 일생을 변화시킨 전환기가 되었다. 미국 북장로교 초대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는 1885년 내한하여 육척 키에 얼굴이 준수하고 말하는 것이 분명하여 총명하게 보이는 할아버님을 보고 예수 믿기를 권유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인재를 알아보고 키울 줄을 아는 안목이 있었다. 성령의 감화를 받은 할아버님은 그 때 결신하여 그에게서 세례를 받고 하와이 이민 대신 언더우드 선교사의 마부가 될 것을 결정했다.”

  

전혀 뜻하지 않게 언더우드 선교사님으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은 김영옥은 세례 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초라한 마부가 되어 복음사역을 돕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또한 그는 세례 받은 것에 그치지 않고 수년 동안 선교사님의 도움을 받아 적극적으로 성경도 공부했습니다. 1년 만에 한문 신·구약 성경 모두를 통독(通讀)할 정도로 열심을 다 했습니다. 또한 선교사로부터 전도법과 장로교회에 관해 배웠고, 선교사들과 대화할 수 있는 간단한 영어실력도 갖추게 되었습니다. 모든 과정을 이수한 김영옥은 실력있는 매서인(賣書人)이 되었고, 공식적인 매서인으로서 사역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서울로 올라온 김영옥은 1893년 모삼열(Samuel. F. Moore) 선교사님의 조사가 되어 순교를 각오하고 서울 종로 5가, 4가 등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몇 명의 성도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들이 1894년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님과 그의 조사인 서상륜과 함께 연지동 초가(草家)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연동(蓮洞)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연동교회 초기 성도들은 천민(賤民)에 속한 갖바치, 배추장사, 하급병졸 등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연동교회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당시 연동교회 설립에 영향을 준 선교사들은 이길함 선교사님, 민로아(F. S. Miller) 선교사님, 빈돈(C. C. Vinton) 선교사님, 기보(D. L. Gifford) 선교사님이며, 이들은 각각 김영옥, 천광실, 서상륜, 김흥경, 홍정후 조사들과 동역하며 이 지역의 전도에 힘을 쏟았습니다. 연동교회 100년사에는 이들 선교사 중에 모삼열 선교사님이, 조사로는 김영옥이 가장 먼저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비록 첫 예배가 이길함 선교사님과 서상륜 조사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모삼열 선교사님과 김영옥 조사가 연동교회 설립에 첫 공로자였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그런데 조사 김영옥의 손자인 김형태 목사님은 교회가 세워진 지 73년 후인 1967년, 연동교회 제5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교회를 섬기게 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볼 수 있습니다. 연동교회 출발에 큰 공(功)을 세운 조부(祖父) 김영옥 조사의 뒤를 이어 손자인 김형태 목사님은 담임목사로 부임한 것입니다. 그는 1989년 조기 은퇴하기 까지 22년 동안 연동교회와 총회, 그리고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전도한 사람들에 의해 개척된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했을 때 손자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아마 감격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또한 김영옥 목사님을 통해 한국교회에 명문(名門) 신앙가문(名門家門)이 만들어졌습니다. 김형태 목사님에 따르면 1대인 김영옥 목사, 2대인 김영옥 목사의 장남인 김은석 목사, 3대인 김은석 목사의 자녀인 김형칠목사, 김형일 목사, 김형태 목사, 김형달 목사, 김형숙목사, 4대 김형규 목사, 김대규 목사 후보생 등 4대에 걸쳐 총 9명의 교역자가 배출되었습니다. 김영옥 목사님은 한국교회 130년 역사 가운데 다시 배출되기 힘든, 그러나 한국교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까맣게 잊혀진 최고의 명품 목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김영옥은 조사로서 서울의 승동교회와 동막교회 설립에 관여함으로써 이 땅에 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쉬지 않고 감당했습니다. 특히 승동(勝洞)교회는 1893년 모삼열 선교사님과 16명의 교인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모삼열 선교사님의 조사는 김영옥이었고, 따라서 그는 승동교회 설립에 직간접적으로 관계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현재 교회가 서 있는 인사동으로 이전(移轉)한 것은 1904년으로 당시 이곳에는 조계종 등 많은 절(寺)들이 있었는데 모삼열 선교사님은 불교마을인 이곳에서 성도들이 신앙생활에 승리할 것을 바라며 이길 승(勝)과 마을 동(洞) 자를 따서 승동(勝洞)교회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후 김영옥은 서울을 벗어나 더욱 활발하게 전도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경기 동쪽과 황해도 이남(以南)으로 순행하며 전도해 백천, 평산, 금북, 금성, 양구, 화천, 양주, 포천, 등지에 여러 교회를 설립에 기여했습니다. 특히 김영옥은 1898년 모삼열 선교사님과 함께 전도하고 개척한 고향인 황해도 백천군 운교(雲橋)교회에서 영수(領袖)와 장로로 섬기기도 했습니다. 김영옥은 전문적인 훈련을 거친 한국교회 초기 매서(賣書)와 조사(助事), 그리고 영수와 장로로 초기 한국교회의 뛰어난 평신도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특히 김영옥은 조사로서 초기 한국교회사에 큰 획을 근 인물이었습니다. 초기 많은 조사들이 있었지만 조선장로교사기에 따르면 김영옥은 조사 중에서도 영향력 있는 발언권을 가진 조사였습니다. 특히 이만열 교수는 사적(私的)인 자리에서 김영옥이 한국 장로교 최초의 조사일 가능성이 있다고 그의 손자인 김형태 목사님께 밝혔다는 것입니다. 그가 김영옥을 최초의 조사로 가정한 이유는 수십 명의 초기 조사들이 함께 모여 찍은 사진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진 뒤에 적혀 있는 이름 중에서 김영옥이 가장 먼저 기록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만열 교수는 사진 속에 적혀있는 이름의 순서가 연령의 다소, 출신지역, 활동지역 등과는 관련이 없어 보인다고 하면서 아마 이름의 순서가 최초의 조사,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조사나 가장 활동성이 큰 조사일 가능성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추측했다고 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김영옥은 매서와 조사로 활동하기 전에 모든 과정을 이수한 실력을 갖춘 협력자였으며, 영수와 장로로 교회를 섬겼던 인물로 당시 한국교회에서는 몇 되지 않는 평신도 리더였던 것입니다. 또한 김영옥은 장로로 1903년 9월, 1904년 9월, 1906년 9월 세 차례에 걸쳐 장로교공의회 경성소회 총대 장로로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7명의 한국인 목사가 처음으로 배출되기 전 까지 김영옥은 당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평신도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따라서 당시 활동하던 많은 조사 중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사 김영옥은 1903년부터 시작된 오월번(Arthur G. Welbon) 선교사님과 동역함으로써 더욱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강원도에서 오월번 선교사님과 함께 동역한 김영옥은 철원, 춘천 등지에서 전도하고 철원읍교회를 설립했습니다. 1907년 철원이 미국 남 감리교 선교구역으로 편입이 되면서 철원읍교회는 미국 남 감리교로 이관되었기 때문에 같은 해 북 장로교 구역으로 이관된 원주읍교회로 이임하여 조사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오늘날 원주제일감리교회인 원주읍 교회는 1905년 4월 15일 미국 남 감리교회의 무스(J. R. Moose) 선교사님이 세웠는데 장로교로 관할 하에 놓이게 되자 장로교 조사인 김영옥이 이 교회를 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1909년 11월 강원도 원주가 다시 미국 남 감리교 선교구역으로 환원됨으로써 원주를 떠나야 했습니다. 마침 1908년 장로교선교사 총회에서 안동선교부 신설이 결정됨으로써 동역하던 오월번 선교사님과 함께 안동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그 후 김영옥은 조사로서 안동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는데 전력을 다했으며, 1909년 8월 둘째 주일 설립된 안동읍 최초의 교회인 안동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조사로 활발하게 사역하던 김영옥은 만 30세에 1901년 개교한 장로교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는 조사 신분으로 평양을 내왕하면서 목사안수에 필요한 모든 과정을 마치고 만 40세인 1911년(제4회)에 졸업했습니다. 조사와 영수, 장로 등 여러 사역으로 인해 학교 공부에만 전력투구할 수 없었던 김영옥은 졸업하기 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졸업 후 1911년 9월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에서 홍승한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은 김영옥은 안동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赴任)했습니다. 안동교회 초대목사로 부임한 것을 계기로 김영옥 목사님은 그동안 선교사의 조사 신분으로 미국 선교부로부터 사례를 받던 고용인의 삶에서 이제는 교회로부터 생활보장을 받는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안동교회의 초대목사인 동시에 경북 북부지방 최초의 한인 목사였습니다. 그의 부임으로 안동교회는 경북에서는 대구제일교회 다음으로 한인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가 되었고 그의 뛰어난 영적 지도력은 안동 지역의 복음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김영옥 목사님의 부임은 안동을 포함한 경북 북부지역에도 한국인 목사가 담임으로 교회를 섬기는 길을 열게 했습니다.

  

특히 김영옥 목사님이 담임으로 섬겼던 1911년부터 1921년 까지 안동교회는 안동지역의 중심교회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09년 8월 8일 설립된 안동교회는 1년이 채 지나기 전에 무려 75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발돋음했습니다. 안동교회의 첫 학습자는 설립된 지 1년이 지난 1910년 8월 18일에 배출되었는데 강복영 외 14명이 학습을 받았습니다. 또한 1911년 3월 2일 세례를 베품으로 첫 세례교인으로 권중한 외 8인이 배출되었습니다. 1911년에는 오늘의 초등학교 수준인 계명학교를 설립함으로써 섬김과 봉사로 지역사회와 소통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계명학교는 개교 시 여자학생에게만 입학이 가능했습니다. 당시 여학생들은 보통학교, 소학교에 다니는 것이 힘들었는데 계명학교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대처했던 것입니다. 특히 1913년에는 김병우를 장로 장립함으로써 안동지역 최초로 당회가 구성되었고, 주일학교와 여름성경학교를 조직하여 어린이들의 신앙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1913년 경북북부지방에서는 처음으로 여전도회를 조직하고 도사경회를 개최함으로써 여성들의 신앙교육에도 집중했습니다. 이 모든 일은 김영옥 목사님이 안동교회에 초대 목사로 부임한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1913년 8월 9일에 안동교회 첫 당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 회장은 동사목사인 오월번 선교사님이었습니다. 1913년 8월 14일에 있었던 제2회 당회장 역시 오월번 선교사님으로 6인 세례와 3인의 학습을 결의하고 8월 17일 주일 오후 2시에 세례와 함께 성찬을 베풀었음을 당회록은 기록합니다. 이 성찬에 참여한 수는 66명이었다고 당회록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성찬은 당회 조직 후 첫 성찬예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찬의 집례자는 당회장인 오월번 선교사님이 아니라 초대 담임인 김영옥 목사님이었습니다. 안동교회가 설립된 후 교회의 사역에 중요한 역할을 하던 선교사가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직을 위한 당회를 마친 후 한인 담임 목사에게 첫 세례식과 성찬식 집례를 양보한 것입니다. 이것은 안동에 주재하고 있던 선교사들의 큰 배려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교사들은 안동교회 초대 담임목사에게 리더십을 조금씩 이양(移讓)해 한국인 목사의 지도력을 배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안동교회는 설립 초기부터 한인 목사와 선교사들이 서로 동역한 아름다운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김영옥 목사님은 1920년 안동기독청년회를 조직했으며, 1년 후인 1921년 전국 최초로 기독청년면려회를 조직함으로 청년의 신앙교육과 계몽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안동교회는 100년이 넘는 역사에서 부속건물이 아닌 본당을 단 3번 건축했는데, 김영옥 목사님이 시무하던 기간인 1911년부터 1921년의 10년 동안 2/3인 두 곳에 예배당을 건축했습니다. 첫 예배당은 그가 조사로 섬길 때인 1910년 10월 30일 준공한 16칸 ‘ㄱ’자 예배당입니다. 안동교회가 건축한 첫 번째 예배당인 16칸 ‘ㄱ’자 예배당은 약 25 평 규모로 현재 안동교회 정문에서 2시 방향으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합니다. 오월번 선교사님의 부인인 새디(Sadie) 선교사가 매일 기록한 다이어리(Diary)에 따르면 최대 450여명이 앉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예배당 건축을 위해 교인들은 1910년 10월 9일 주일 오후예배 시 특별헌금을 했으며, 당시 조사인 김영옥도 선교사들이 준 지방 순회 때 타고 다니던 노새를 팔아 건축헌금에 보탰다고 합니다. 더욱이 예배당을 신축한 이후 특별부흥집회가 열렸는데 당시 최고의 부흥강사인 길선주 목사님도 강사 중의 한 분이었습니다. 또한 여성과 소녀들을 위해 활발한 성경공부도 이루어졌습니다. 안동교회의 두 번째 예배당인 2층 목조 함석지붕 예배당은 첫 번째 예배당이 준공된 후 급속한 교인의 증가로 인해 1914년 초 준공되었습니다. 약 40여 평 규모로 추정되는 이 예배당은 현재 안동교회 부지(敷地) 안에 있는 100주년 기념관과 동일한 위치입니다. 이때도 김영옥 목사님은 선교사가 사준 가옥을 팔아 헌금했을 정도로 교회를 위해 헌신했던 분입니다. 두 번째 예배당의 준공으로 주일학교의 활성화가 이루어져 양적으로 또 질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20년 7월, 안동지역에서 최초로 여름성경학교가 열렸으며, 이듬해에는 주일학교가 조직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인근 지역이 교회들이 연합하여 모일 수 있는 부인도사경회 등 대형집회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김영옥 목사님의 부임으로 안동교회는 사역의 내용, 교회의 건물과 조직 등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또한 김영옥 목사님은 안동지역과 경북북부지역에 산재한 교회들을 든든히 세운 교회지도자였습니다. 영주, 지곡, 명동, 풍산, 수동 등 교역자가 없는 미약한 교회들을 순행하며 자청하여 순회목사로 사역함으로써 이들 교회들이 중심을 잡고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게 했습니다. 또한 1912년 사임하고 안동교회를 떠난 후 경북 경산 사월교회, 포항 제일교회, 영주제일교회, 경주제일교회, 풍기성내교회 등 경북북부 지역 교회가 이전 보다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들 교회들이 뛰어난 영적 리더십을 바탕으로 지역복음화의 중심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는 1919년 3월 18일에 있었던 안동 3·1 만세운동의 주역(主役)이었습니다. 그는 안동교회 장로인 이중희, 안동군청 서기인 김원진, 세브란스의전 학생인 김재명, 일본 2·8 독립선언에 참여한 유학생 강대극과 만세운동을 사전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3월 12일 예비검속으로 검거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갖은 협박과 모진 고문에도 3·1운동 계획을 누설하지 않음으로써 안동의 만세운동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또한 1922년 경산 사월교회에 부임하면서 경북 일대의 장로교 지도자들에게 비밀리에 독립공채모집을 독려하는 한편, 점포나 시장에 독립운동 선전물을 살포하게 하고, 국제회의에 조선독립을 청원하기도 했습니다. 포항교회(현 포항제일교회)를 담임으로 섬길 때는 1927년 4월 교회 중직자들과 상의하여 기독교 지도자들이 주도하여 전국적으로 참여한 독립운동인 신간회를 포항에 설치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김영옥 목사님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여러 번 일제 경찰에 체포되고 검찰에 송치되는 고난을 받았지만 나라를 사랑하는 일에 어떤 후퇴나 포기를 몰랐던 애국지사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정신은 해방 후에도 계속되어 남조선과도정부 문경군과 예천군의 민선 입법의원으로 피선되어 혼란한 국가를 위해 1년 동안 봉사하게 했습니다.

  

김영옥 목사님은 언더우드 선교사님께 세례를 받은 이후 일평생 동안 복음전도와 교회 목회에 전념한 목회자들의 롤 모델(Role Model)과도 같은 분이었습니다. 그는 일제 식민통치 하에서 여러 차례 검속과 체포 등으로 고난을 당했지만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교회로 돌아왔고 그에게 주어진 목회에 충실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이었습니다. 김영옥 목사님은 일제 강점기, 광복, 건국, 6·25 전쟁 속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김영옥 목사님은 교회에서는 사랑의 목자였고, 지역 사회와 국가를 사랑한 공의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날마다 경건한 신앙생활을 통해 얻은 영적 통찰력과 지도력은 교회나 사회적으로나 지도자가 되게 했습니다. 특히 김영옥 목사님이 사역했던 시대는 교회가 민족정신의 보루(堡壘)요 민족운동의 근거지였고, 그는 교회가 이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사고는 그가 한 교회의 목사로서 뿐 아니라 지역교회를 하나로 묶는 리더 역할을 수행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이 정신은 그가 지역사회의 리더로서 시대적 사명을 수행하도록 강요했던 것입니다. 김영옥 목사님에게는 교회를 섬기는 일이나 국가를 위한 모든 일이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긴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요 위험을 무릎 쓰고 국가와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였습니다.

  

안동교회 초대담임인 김영옥 목사님은 당연히 존경받아야 하고 기억되어야 할 믿음의 선배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 단 한 번도 예수님을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살았습니다. 교회에서는 매서인으로, 조사로, 영수로, 장로로, 그리고 목사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고 또 헌신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집이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결과 일평생 하나님을 위해 살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더욱이 김영옥 목사님은 지역사회와 교회가 소통(疏通)해야 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분이었습니다. 지역주민을 위해 섬기고 봉사해야할 일이 있다면 주저함 없이 교회의 사역을 집중하여 용기 있게 실행에 옮겼던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민족과 국가를 위해 일제를 두려워하지 않은 행동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섬겼던 교회는 늘 일제의 눈에는 가시와 같았고, 주시(注視)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라사랑을 포기하지 않은 애국자 중의 애국자였습니다. 김영옥 목사님과 같은 믿음의 선배가 그리운 혼란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교회를 사랑하고 민족과 국가를 사랑했던 김 목사님이 그리운 시간입니다. 김영옥 목사님의 믿음과 혜안(慧眼), 그리고 용기와 끈기를 닮고 싶습니다.

  

2016년 8월 22일

김승학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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