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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9 11:47:12 조회 : 808         
오병이어가 정말 되네요​ 이름 : 김승학   

오병이어가 정말 되네요

 

 학가산(鶴駕山)은 경북 안동과 예천에 걸쳐 있는 안동의 대표적인 산입니다. 주변에 막힘이 없이 우뚝 솟아 있는 높이 882 미터의 학가산은 학(鶴)이 날아가는 형상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학가산의 정확히 위치는 안동군 북후면 신전리와 서후면 자품리, 그리고 예천군 보문면 경계에 있는 산입니다. 자품면 천주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해도 되지만 북후면 신전리에서 학가산으로 올라가기도 합니다. 인근 주민 뿐 아니라 외지의 많은 사람들이 학가산을 찾습니다. 교회의 남선교회 회원들이나 각 지방의 등산객들이 사랑하는 산(山) 중의 하나입니다. 안동에서 영주로 가다가 옹천에서 좌측으로 약 20 여분 동안 자동차로 올라가면 학가산 등산 표지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른 쪽으로 사과밭이 많이 있는 신전마을이 보이고 마을 우측 편으로 신전교회가 보입니다. 신전(薪田)은 섶밭으로 뽕나무 밭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마 누에를 키우는 동네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전해져 1934년에 신전(薪田)마을에 교회가 세워짐으로써 신전(神殿), 즉 하나님의 전(殿)이 있는 마을이 되었습니다. 애초부터 신전마을은 하나님의 전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마을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재의 아름다운 신전예배당은 수년 전 김수만 목사님이 시무할 때 어려운 여건 속에서 준공됐습니다. 신전은 자동차 밑으로 보이는 마을은 수십 호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마을입니다. 하지만 자동차로 마을을 통과하면서 신전교회를 통해 신전마을이 구원의 마을이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학가산 등반 지점에 가기 전 옹천면에서 좌회전하여 약 10분 정도 산 쪽으로 운전하면 간 도로에서 좌측에 마을이 있고 여러 집들 사이에 서있는 교회와 교회 옆에 있는 사택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서 있는 마을 이름은 음지(陰地)입니다. 음지 마을 위 아래로 양지(陽地) 마을이 있습니다. 음지마을 위 동네를 상(上) 양지마을이라고 부르고, 아래를 하(下) 양지마을이라고 합니다. 두산(頭山)교회는 지금부터 51년 전인 1965년 마점마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곳은 옛날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고, 여기에서 발굽을 교환했다고 합니다. 마점마을에 있는 12칸 초가집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두산교회가 시작한 것입니다. 마점마을 옆에는 굴암마을이 있습니다. 두산교회는 산재(散在) 마을로 구성되어 있는데, 옹천에서 학가산 쪽으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굴암과 마점마을, 그리고 더 올라가면서 좌측으로 앞서 언급한 음지마을, 하 양지마을과 상 양지마을 5개 부락 주민으로 구성된 교회입니다. 처음에 마점마을에서 시작한 두산교회는 4개 마을 중에서 가장 가구(家口) 수가 많은 음지마을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음지마을은 당시 인근 5개 부락에서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지형의 여건으로 볼 때 음지마을로 이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마점마을 사람들 중에는 교회를 빼앗긴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답니다. 그래서 교회 종을 옮기다가 작은 충돌로 교회 종에 상처가 나기도 했답니다.

  

음지마을로 이전한 두산교회는 새로운 도약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1968년 담임교역자로 부임한 권영택 전도사님은 교회를 신축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권영택 전도사님은 녹전교회 장로로 신학원을 졸업하고 여러 마을을 다니며 복음전도에 힘을 쏟던 분이었습니다. 그는 송현교회를 섬기고 있는 권오수 목사님의 부친입니다. 교인들의 합심과 권 전도사님의 수고를 통해 흙벽돌로 지은 23평의 첫 예배당이 준공되었습니다. 이것은 음지마을로 이전한 후 건축한 두산교회의 첫 예배당인 동시에 두산교회가 첫 예배를 드린 후 3년 만에 건축한 예배당입니다. 이 때 당시 안동성소병원 원목인 이기형 목사님이 설교와 두산교회 설립에 중심인물이었던 이주한 장로님의 기도로 헌당예식을 가졌습니다. 그 후 두산교회는 다시 교회를 건축하고 1983년 4월 5일 교회 창립일에 예배당을 봉헌하게 됩니다. 헌당예식과 함께 강재원·최동구 두 분의 장로임직을 통해 두산교회는 교회 역사상 최초로 당회를 구성함으로써 조직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후 탄탄하게 교회가 성장했지만 농촌 인구의 급감은 교회가 서 있는 음지마을과 인근 마을에도 예외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음지마을은 수년 전 까지만 해도 130호(號)가 넘었지만 이제는 90호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 되었고 현재는 시무장로 1명인 미조직교회로 바꾸었습니다.

  

현재 두산교회는 전형적인 시골교회로 자그마한 교회입니다. 두산교회 개척 역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1965년 초 안동성소병원 직원 전도회는 이곳에 교회를 설립할 목적으로 현지답사를 실시했습니다. 의료진을 보내 마을 주민들을 무료로 치료하면서 교회 설립의 가능성을 살펴본 후 교회설립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탐색 후 얼마 지나지 않은 후 1965년 4월 7일 첫 교역자로 석성균 전도사님을 파송함으로써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성소병원 직원 전도회는 두산마을을 탐색하여 모든 조사가 끝나고 교회를 세우려는 분명한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공식적인 탐색이 있은 지 며칠 후에 교회가 세워진 것으로도 증명됩니다. 그리고 교역자가 파송된 지 한 달 후인 5월 4월 개회된 제 77회 경안노회에서 교회설립 허가를 받고 공식적인 교회로, 엄밀한 의미에서는 기도처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온 맘과 뜻을 다해 헌신하여 두산교회를 섬긴 교역자로는 석성균 전도사님, 권영택 전도사님, 서재현 장로님, 유윤종 전도사님, 이재호 전도사님, 이상출 전도사님, 김헌정 전도사님, 구옥순 전도사님, 김수만 전도사님, 김성생 전도사님 등이 있으며, 현재는 여성 교역자인 박미혜 목사님이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노회 임원들과 함께 영주에 회의를 다녀오다가 자동차 안에서 우연히 두산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영주에서 안동으로 올 때 길을 잘못 들어 신전에서 월전으로, 월전에서 두산으로, 그리고 옹천을 거쳐 안동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 이 산길을 잘 알고 있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안동에 있는 교회를 섬긴 교역자들과 장로님들이었습니다. 특히 승합차에 동승한 안동교회 전경상 장로님은 40여 년 전 청년부에서 활동할 때 이곳 두산, 신전도 여러 번 방문했다고 말했습니다. 농활, 여름학교지원 등 농촌교회를 봉사하기 위해 이 길을 오를 때 비가 오면 포장하기 전이라서 굳었던 진흙 도로가 바로 질퍽해져 애를 많이 먹었다는 것입니다. 진흙에 미끄러져 넘어지기 일 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청년들이 옹천, 두산, 신전 등 이 지역을 찾아 사랑의 봉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던 귀한 사역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두산교회의 상황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의 헌신과 기도로 이 산촌(山村) 마을에 교회가 자리를 잡고 오늘 까지 서 올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부노회장인 이상출 목사님이 두산마을에 이르기 직전에 자신과 두산교회의 특별한 관계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무려 40년 전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설립되고 몇 년이 지났을 까 한 집사님이 과수원을 하면서 경안신학원을 다니고 있었답니다. 그의 이름은 강병도입니다. 졸업을 하면서 이 집사님이 두산교회를 맡아 섬기게 된 것입니다. 초창기 교인 중에는 강병도 집사님이 두산교회의 오른팔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강집사님이 대전으로 이사하게 되었고, 그가 떠나자 교회는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문을 닫을 위기에 까지 처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두산교회에는 몇 명의 아주머니들만 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수십 명이 모일 때도 있었는데 불과 몇 명밖에 남지 않은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그 때 두산교회를 개척한 성소병원 직원 전도회는 병원에서 전도사역을 감당하고 있던 이상출 전도사님이 두산교회를 섬겨줄 것을 요청하게 됩니다. 요청이라기보다는 사정인 동시에 강요에 가까웠습니다. 힘들게 개척한 교회가 문 닫을 형편에 처하게 되었으니 병원 직원 전도회 회장이 한번만이라도 교회에 가 볼 것을 통사정했다는 것입니다. 직원 전도회 회장의 요청을 받고도 갈 생각이 없다고 이상출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평일에 채플을 돕고 환자들을 돌보야 하기 때문에 새롭게 주어질 주일사역에 전념하기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소식을 주변 교역자들을 통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면 고생할 것이 너무도 분명했습니다. 그렇지만 직원 전도회 회장의 간절한 요청에 한번만 가겠다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두산교회로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1976년 3월 어느 주일, 이상출 전도사님은 교회에 도착해서 3명의 교인 밖에 남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전도사님은 안동에서 매주 금요일 오후에 두산교회에 들어와 한 권사님 집에서 숙식을 하며 주일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의 목회는 1979년 3월 초 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이상출 전도사님이 처음 두산교회에 도착해서 첫 예배에 참석한 사람은 3명이었습니다. 교회에 3명의 성도들만이 남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 분의 사기도 많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사실 이들은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훈련도 거의 없는 상태였습니다. 초신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는 곧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는 무기력과 패배의식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이들이 교회에 나오긴 했지만 정상적인 교회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때 이상출 전도사님이 결정한 것이 어린이 전도 및 어린이 사역이었습니다. 두산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택한 방식은 어른들을 직접 전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회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동네에 살고 있던 초등학교 학생들인 어린이들에게 집중한 것입니다. 우선적으로 어린이들을 교회로 오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상출 전도사님은 1년에 두 차례 어린이 전도에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여름방학 때 할 수 있는 여름성경학교와 겨울방학을 이용한 성탄절을 기회로 삼고 치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동네 어린들을 초대하기 위해 그는 초청하는 편지를 한번만 보낸 것이 아닙니다. 무려 4번이나 모든 마을 어린이들에게 정성껏 쓴 편지를 보냈던 것입니다. 첫 편지를 받았을 때 어린이들은 시쿤등하게 반응했지만 두 번째, 세 번째 편지를 받았을 때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편지를 받고는 예정된 그 날, 거의 모두 교회에 나올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새로운 교역자가 오고, 그 교역자가 새로운 사역을 하자 마을에 좋은 소문이 조금씩 퍼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로부터 멀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교회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린이들이 교회에서 온 편지를 받고는 서로들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게 어른들의 귀에 들어 간 것입니다. 동네 어린이들은 그들의 아들이었고, 딸이었으며, 손주들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자식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교회에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애정을 갖고 있음을 확인한 동네 어른들은 교회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새로운 사역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하나 둘씩 교회로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 교회에 출석했던 마을 주민들 중에서 우선적으로 아낙네들이 교회의 문턱을 넘어 들어왔습니다. 교회에 뜸하던 아낙네들은 교회 안에서도 자신들에게 가장 익숙한 곳으로 들어왔습니다. 예배당으로 직접 들어오기가 쑥스러우니 주방에 먼저 들어왔던 것입니다. 떠났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들어옴으로써 교회는 다시 교인들로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사랑으로 관심을 보이는 교회를 보면서 조금씩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된 것입니다.

 

계획한 날짜가 다가오자 교인들은 기쁜 마음으로 여름성경학교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 올 어린이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교인들은 광목으로 주머니를 만들고 거기에 선물을 가득 넣었습니다. 그러나 초청대상인 어린이들의 선물을 준비하기 위한 교인이 너무 적었습니다. 그래도 준비하는 일에 온 힘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여름성경학교에 임박한 날짜에 초청대상자의 집을 일일이 방문하며 마지막 네 번째 편지와 함께 광목 주머니에 넣은 선물을 전달했습니다. 여름성경학교 당일, 기적이 발생했습니다. 초청편지를 받은 대상자 모두가 성경학교에 나온 것입니다. 단 한명도 빠지지 않고 여름성경학교에 참석함으로써 교인들을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5개월 후 그 해 성탄절, 두산교회는 처음으로 어린이를 위한 성탄축하행사를 가졌는데, 초청대상 모두가 또 다시 참석하는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 때 교인들이 한 말이 있었답니다. 성경에 기록된 오병이어, 많이 들었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두 차례 어린이들의 참석을 보면서 오병이어의 뜻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5개의 떡 덩어리와 2마리의 물고기로 5천명을 먹이시고 12광주리가 남은 것이 사실일까 의심했는데, 작정한 어린이들이 교회로 몰려오는 것을 보면서 오병이어가 2000년 전에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정말 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말했다는 것입니다. “오병이어가 정말 되네요.” 이것은 이들의 신앙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성소병원에서의 사역을 마친 이상출 목사님의 위동교회 사역에서도 마찬가지 오병이어의 기적이 발생했습니다. 위동교회는 1979년 8월 5일, 김동숙 장로님에 의해 정성호씨 댁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설립되었습니다. 그런데 1983년 7월 30일, 이상출 전도사님이 부임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전도사님이 위동에 가서 첫 예배를 드릴 때 어른은 6명이 어린이는 16명이 모였습니다. 두산교회 만큼은 아니지만 아주 적고 약한 시골교회였습니다. 그는 다시 교회 주변에 살고 있는 어린이에 주목했습니다. 어린이들을 조사했더니 주변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이 무려 25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때 이상출 전도사님은 두산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마을 주변의 어린이들을 교회로 초대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어린이들이 방학을 맞는 기간인 여름성경학교와 성탄절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는 두산에서처럼 동일한 공을 들였습니다. 모두 어린이들이 여름성경학교에 나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두산과는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먼 거리에 살고 있는 어린이들이 너무 많았다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자동차로 어린이들을 태워 교회로 올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교회에 나올 마음이 있는 친구들도 나오는 것이 너무도 힘이 들었던 것입니다. 멀리서 교회에 온 친구들은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이미 녹초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전도사님은 고민하다가 새로운 방법을 고안하게 됩니다. 그것이 어린이들을 찾아가는 성경학교였습니다. 교회로 어린이들을 불러 모이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어린이들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경학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 살고 있는 마을로 찾아 가서 성경학교를 운영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 방법은 많은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는 매우 혁명적인 방식이었습니다. 누구도 좀처럼 생각하지 못한 발상(發想)의 전환이었습니다. 교회 위주가 아니라 어린이가 있는 곳 중심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이들이 있는 마을로 찾아간다고 하더라도 예배를 드리고 활동을 할 수 있는 예배당과 같은 공간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즘처럼 마을회관이나 경로당이 마을마다 세워져 있던 시절이 아닙니다. 따라서 마을을 찾아가더라도 길거리에서 성경학교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이 성경학교를 ‘골목성경학교’라고 불렀습니다. 골목으로 어린이들을 모아서 거기서 여름성경학교를 진행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위동교회의 여름성경학교는 한 날 한 시에 한 교회에서 시작되고 마친 것이 아닙니다. 골골을 찾아가야 했고 골목에서 성경학교를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한 여름은 거의 매일 위동의 마을에는 어린이를 위한 여름성경학교가 열렸습니다. 그 날 정해진 골목으로 출발하기 전에 교회에서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습니다. 성경공부 할 교재와 활동에 필요한 교구들 뿐 아니라 간식거리도 챙겨야만 했습니다. 당시 가장 인기 있던 간식 품목은 새우깡과 캔디였습니다. 그래서 마을 골목으로 떠나기 전에 새우깡 박스와 캔디 박스를 둘러메고 골목으로 나갔습니다. 이미 소식을 듣고 나와 기다리고 있는 어린이들도 있었고, 여름성경학교를 시작한다는 소리를 듣고 모임장소로 오는 어린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곳 위동에서도 모두를 놀라게 할 기적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위동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이 250명 전원이 여름성경학교에 참석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오병이어가 정말 된 것입니다. 오병이어를 들은 사람들은 말도 안 된다고 반응합니다. 하지만 오병이어는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2+5가 7이 아니라 5000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2+5는 5000이 아니라 12 광주리가 더 보태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습니다. 한 사람의 헌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은 이처럼 놀랍습니다. 우리 모두의 생각을 넘어섭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증거합니다. 우리 삶의 자리도 이처럼 오병이어의 기적이 실현되는 현장이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두산교회 성도들처럼 ‘오병이어가 정말 되네요’라는 고백과 간증이 날마다 넘쳐 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16년 8월 18일

김승학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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