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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3 16:58:15 조회 : 194         
영양 오리(梧里)동 촌사람 장로님 이름 : 김승학   

 

영양 오리(梧里)동 촌사람 장로님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달란트를 가지고 여러 가지 일을 아름답게 감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다. 오늘 소개하는 곽만영 장로님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잘 사용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고 있는 분이다. 그는 분명한 소명의식과 사명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일에 전심전력해 왔다. 소도시 안동에 위치한 미션 스쿨의 선생님, 교장 선생님, 작은 농촌 교회를 섬긴 전도사님, 대학교 옆 교회의 장로님, 시인인 동시에 수필가 등 다양한 이력(履歷)을 가지고 다양한 삶을 살아왔다. 여러 호칭 중에서 필자는 그를 장로님으로 부르는 것이 가장 편하다. 처음 장로님으로 만났기 때문이다.

 

곽 장로님의 증조부 곽석진은 가장 오지 가운데 하나인 경북 북동부지역인 영양에서 최초로 복음을 받아들인 인물 중의 한분으로 알려져 있다. 후에 영수가 된 그는 1903년에 영양군 청기면에 찰당골 교회와 1905109일에 영양군 일월면에 오리교회를 설립했다. 올해로 118주년을 맞는 오리교회는 지금도 그 지역의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작지만 큰 교회이다. 당시 찰당골 교회는 내당동 교회라고도 불렸다. 안동 지역에 최초로 교회가 세워진 해()1902년이니 1903년에 가장 오지(奧地)인 영양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의외가 아닐 수 없다. 내당동 교회는 문을 닫았지만 일부 교인들이 다시 내당동 교회를 세웠다. 일제의 박해와 생활고로 인해 교인들은 하나씩 흩어져 내당동 교회 역시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이후 청기면에는 1920118일 청기교회가 설립되어 오현팔 조사가 교회를 섬기다가 우여곡절 끝에 19251월 교회가 매각됨으로써 문을 닫았다. 그 후 27년이 지난 195211월 경안노회로부터 교회 설립허가를 받아 다시 문을 열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곽만영 장로님은 영양군의 골짜기인 오리(梧里)동에서 출생했다. 오리동은 일월면 소재지에서 수비면으로 가는 길목 근처에 있다. 오리라는 이름은 마을의 땅 모양이 오동나무 가지처럼 갈라지고 둥그스름하고 평평하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본래 영양군 북초면의 지역으로서 오리현()이라고 했는데,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에 약물내기평지샘마새마노루모기배골왕바우골을 모두 합하여 오리라고 하여 일월면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1905년 설립된 오리교회는 일제 강점기에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1943년 문을 닫았다. 이때 교인들은 인근 주곡교회 등으로 흩어지거나 가정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1952년 봄, 대구 남산교회의 손영식 전도부인이 오리 마을에 거주하면서 이전에 신앙 생활하던 성도들을 중심으로 전도하여 주일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손 전도부인은 안동선교부로부터 구호물자를 받아 마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들린 여자를 고칠 뿐 아니라 예수님에 관한 영화를 전도의 도구로 사용했다. 그 결과 예배자의 수가 늘어 마을에 기와집을 마련하여 일제시대 때 폐교된 지 10년 만에 교회가 다시 복구되었다. 특히 주위에 1,000여 호가 모여 생활터전을 삼고 마을을 이루어 교회마, 교회마을, 혹은 교회촌(敎會村)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이것은 오리교회가 크게 부흥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오지 중에서도 오지인 고향 오리동을 떠나 안동과 서울에서 학업을 마친 이후 곽 장로님의 평생 삶의 자리는 안동이었다. 공직에서 은퇴한 이후 그는 다시 고향 땅 오리동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는 자신을 안동 촌사람, 오리동 촌()사람으로 부른다. 그의 고백이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촌스럽기 짝이 없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오리동 촌놈으로 놀림을 받기 예사였다. 어린 나이에도 오리동은 의례 촌구석으로 인식되어 촌놈이라는 이름이 낯설지가 않아서인지 나는 촌놈이다라는 인식이 뇌를 지배한 듯하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누구보다 첨단적 사고로 꽉 채워진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오지에서 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으며, 미국에서 유학생활도 했다.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태어났고, 복음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은혜를 누리고 있다고 그는 고백한다.

 

곽 장로님은 젊은 시절 안동지역의 시골 교회인 임하교회와 이천교회에서 전도사로 섬겼고, 평생 안동대학교 가까이에 있는 송천교회에서 장로로 봉사했으며, 노회와 기독교의 여러 유관기관에서 맡겨진 일에 헌신해 왔고, 선교회를 조직하여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선교를 도왔으며, 세계 열방에 파송된 선교사들을 후원하였고, 모교인 미션 스쿨에서 일생동안 교사와 교장 선생님으로 재직하면서 크리스천 교사회를 조직해 섬겼으며, 안동과 다른 지방의 여러 기독교 유관기관에서 봉사함으로써 모든 생애를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데 전력투구했다. 그는 경안중학교 교사로 봉직하면서 197299일부터 19771월 까지 임하교회에서 44개월 동안 주일목회를 하며 약 21평의 대지 위에 예배당을 건축한 후 사임했다. 이어 19772월부터 1년 동안 다시 이천교회를 섬김으로써 교역자로 생활했다.

 

당시에는 한국교회는 교역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곽 장로님은 주일 목회를 할 수 있었다. 곽 장로님은 7세 때 목사가 되겠다고 하나님께 기도한 적이 있었는데, 철없는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그의 자서전을 통해 밝힌 적이 있다. 비록 그는 전문적인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목회자 보다 더욱 하나님 나라를 든든히 세우는 일에 헌신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해외에 파송된 열방(列邦)을 위한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일생동안 누구보다 치열한 선교적 삶을 살아왔으며, 또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아마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천국에 입성하기 전까지 복음을 위한 삶을 이어가리라 의심치 않는다.

 

곽만영 장로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출생한 이후 단 한 번도 곁길로 가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평범한 일상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귀한 도구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선교적 삶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가 달려온 선교적 일상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한다. 전도가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는 요즘, 교회의 부흥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인은 낙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너무 두려워하지 말자. 조급하게 생각하지도 말자.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열심을 다하고, 선교적 삶을 살다보면 우리가 호흡하며 밟고 있는 이 세상이 결국에는 하나님 나라로 바뀌게 될 그 날이 오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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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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