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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8 21:45:12 조회 : 589         
안동교회의 직계(直系) 4대 장로 가문​ 이름 : 김승학   

안동교회의 직계(直系) 4대 장로 가문

 

1984년 8월 15일부터 19일까지 5일간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있었던 한국교회 선교 100주년 기념식에서 4대 목사·장로 가문(家門)을 표창한 적이 있습니다. 이 때 선정된 것은 동일한 교회에서 임직 받은 장로 가문이 아니라 어느 교회에서 장로 임직을 받은 것에 관계없이 직계로 4대 장로 가문을 선정하여 표창했습니다. 당시 네 가정이 표창을 받았는데, 강필순, 강영환, 강운섭, 강신원(경동제일교회), 고익명, 고찬선, 고길용, 고성삼(대구 내당교회), 이중희, 이재삼, 이인홍, 이정일(경북 안동교회), 이제우, 이용설, 이근영, 이원중(서울 남대문교회) 등이었습니다. 이 네 가정 중에서 안동교회 이중희 장로 가정은 동일한 교회에서 장로로 섬긴 전국 유일한 4대 장로 가정이었습니다. 

 

또한 한국교회 선교 100주년 기념식에서 선정된 직계 4대 목사 가정은 한 가정이었는데, 1983년 본 교단 제68회 총회장을 역임한 림인식 목사(서울 노량진교회) 가정으로 림준철, 림재수, 림인식, 림형석(본 교단 제103회 총회장) 목사님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 이후 한국교회는 3 가정의 직계목사 가문을 갖게 됩니다. 첫째는 김영옥 목사(안동교회 초대 담임, 안동3·1만세운동 주역), 김은석, 김형태(연동교회 원로, 본교단 72회 총회장), 김형규 목사 가정이며, 둘째는 박영화, 박상동(안동교회 4대 담임), 박대선(연세대 총장), 박태기 목사 가정이며, 마지막으로 이만집 목사(대구제일교회 5대 담임, 대구 3·1만세운동 주역), 이성혜, 이호문(인천숭의감리교회 담임), 이선목 목사가 바로 그들입니다.  

 

사실 한 교회에서 장로가 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선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이 있어야 하며, 또한 교인들로 부터도 인정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 가문에서 4대 장로를 배출하는 것도 어렵지만 한 교회에서 직계(直系)로 4대에 걸쳐 장로로 섬긴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가문의 영광인 동시에 교회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30년의 역사를 넘어서고 있는 한국교회는 장로 직분으로 교회에 헌신함으로 대(代)를 이어 충성하는 가문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영남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한 가정에서 3대 혹은 4대 장로로 헌신하는 가문의 분포가 과반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호남지역은 죽음으로 믿음의 대가 끊어진 반면, 영남지역은 비록 순교자(殉敎者)의 수는 적지만 항일운동에 힘쓰며 대를 이어 믿음을 지킨 가정의 수가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이 아닌 가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전국에 산재(散在)한 4대 장로 집안은 수십 가정에 이릅니다. 그러나 한 교회에서 4대 시무장로로 섬긴 경우는 극히 적습니다. 동일한 교회에서 직계로 4대 장로가 배출된 교회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서울의 경동제일교회는 1913년 12월 10일 강필순 장로의 장립을 시작으로 1931년 5월 10일 장립한 강영환 장로, 1958년 10월 28일 장립한 강운섭 장로, 마지막으로 1974년 6월 9일 장립한 강신원 장로를 배출했습니다. 두 번째는 교회는 안동교회로 1915년 5월 7일 장립한 이중희 장로, 1948년 3월 15일에 장립한 이재삼 장로, 1964년 12월 13일 장립한 이인홍 장로, 1983년 5월 8일 장립한 이정일 장로가 그들입니다. 세 번째는 대구남산교회로 1931년 장립한 이종옥 장로, 1953년 1월 장립한 이상우 장로, 1972년 10월 장립한 이철상 장로, 그리고 2010년 11월 장립한 이수형 장로가 그들입니다. 네 번째는 구미상모교회입니다. 이들 네 가문 중에 3/4에 해당하는 세 가정이 영남지역에 위치합니다.  

 

안동교회 직계 4대 장로 가문의 첫 출발은 이중희 장로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1858년 3월 13일 김천군 덕계리에서 출생했습니다. 어릴 때 혼자서 한문을 익혔음에도 불구하고 성장하여 지역의 인정받는 한학자(漢學者)가 되었습니다. 그가 신앙을 갖게 된 이유는 아들인 이재삼의 영향이 컸다고 전해집니다. 김천 장(場)에 갔던 아들 재삼이 부해리(傅海利, Henry Munro Bruen, 1874~1959) 선교사가 전해준 전도지를 읽고 부친 이중희의 마음은 움직였습니다. 결국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된 이중희는 부해리 선교사가 1901년 개척한 김천 아포면의 송천교회에 온 가족이 함께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중희 장로의 6형제 중에서 5형제가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이들은 교회와 학교를 세웠습니다. 특히 막내는 하와이 노무자로 한국을 떠나 이국 땅에서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난 후 350원을 집으로 보냈는데, 이 때 이중희 장로 가정은 교회를 건축하는데 이 중에서 반을 헌금했을 정도로 하나님의 일에 헌신적이었습니다.

 

이후 송천교회로부터 덕계, 김천 황금동, 추풍령, 죽원 교회 등 여러 교회가 분립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먼저 분립된 덕계교회(현 봉산교회)는 이중희와 이희봉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교육에 관심을 갖고 송천학교를 설립하여 지역주민을 계몽하는 일에 앞장을 섰던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동생인 이사윤은 당시 김천지역의 유명한 조사였으며, 송천교회가 설립한 양성(養性)학교 교사, 교감과 교장으로 오랫동안 섬겼습니다. 이중희는 동생 이사윤과 함께 초기 송천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습니다. 그 후 이중희는 1910년 1월 상주군 화서면으로 이사했습니다. 이후 문경지방에서 활동하던 부해리 선교사를 돕다가 1911년 안동교회가 설립하여 운영하던 계명학교 교사로 봉사하기 위해 1913년 안동으로 이사한 것으로 손자 이인홍은 기억합니다. 그러나 이중희는 안동교회 세례인 명부에 1912년 1월 상주군 사곡에서 안동교회로 이거해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계명학교가 설립된 후 가급적 빠른 시간인 1912년 1월에 안동으로 이거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명학교는 1911년 당시 초등학교 연령의 여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려는 의도에서 여학생만 입학이 허락되었습니다. 1911년 3월 남녀공학인 안동소학교가 개교했지만 보수적 성향의 부모들은 여(女)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계명학교는 배울 열의가 있으면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계명학교에는 천민 계급에 속한 백정(白丁) 출신의 자녀도 입학하여 공부할 정도로 계급 타파(打破)에 선도적 역할을 한 학교였습니다. 계명학교가 설립초기에는 3년제로 시작했지만 1927년에는 5학년제로 학제가 변경되었습니다. 1920년 대 까지 재학생 전체가 20~30명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남학생의 입학이 허락된 연도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1913년 선교사 사택이 금곡동 선교 부지 위에 준공되어 선교사들이 이사함에 따라 그동안 현 안동교회 부지 안에 위치한 선교사 임시사택으로 사용되던 가옥을 남학생 교실로 사용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1914~1915년경 남학생도 입학이 허락되어 남녀공학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중희 장로의 손자인 이인홍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안동교회는 계속적으로 성장해 교회 내에 위치한 계명학교는 남녀학생의 수가 약 40~50명이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중희 장로는 1911년 초등교육기관으로 안동교회에서 출범한 계명학교의 교사로 섬기기 위해 문경에서 안동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를 추천한 사람은 부해리 선교사로 안동교회가 설립한 계명학교가 한문 선생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학을 공부한 이중희를 소개했던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중희는 한문에 조예가 깊으면서도 믿음이 좋았고, 나이도 50세가 넘었으며 김천 송천학교와 봉산교회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계명학교 학생들의 한문 선생으로는 최적임자였습니다.  

 

특히 손자인 이인홍에 의하면 조부(祖父) 이중희는 1913년 가족을 떠나 먼저 혼자 안동으로 왔다고 합니다. 2년 후인 1915년 1월 20일경 문경에서 이중희의 가족이 안동으로 올 때 많은 눈이 내려 눈에 발목이 빠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첫날은 상주교회에서 신세를 지고, 둘째 날은 상락교회, 셋째 날은 풍산교회에서 머물렀는데, 머무는 모든 교회의 교인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조부 이중희를 손자는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손자 이인홍의 기억에 따르면 1915년 안동에 도착했을 때 안동교회가 두 번째로 건축한 2층 예배당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1914년 2월, 2층 목조 함석지붕으로 준공된 이 예배당은 장(長)이 50척, 광(廣)이 40척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 안동교회 부지 안에 있던 계명학교에서는 성경도 가르쳤는데, 교사로는 김기한, 이중희 장로의 부인인 박양산, 김순교, 김향난, 장경영, 장복순, 김순애, 이준복 장로의 모친 등 이었습니다.  

 

1900년대 초까지도 백정 신분을 가진 이들은 사람 취급을 받기 힘들었습니다. 걷는 것조차 허리 펴고 걷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심지어 망나니로 불려나가 사형 집행장에서 사람 죽이는 일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안동에 도착해 계명학교 교사로 일하던 이중희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직업에 귀천(貴賤)이 없다는 생각을 갖고 당시 천대받던 백정 3명을 학교에 입학시켜 졸업하는 데 까지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한 직업평등을 주장한 이중희는 몸소 아들 이재삼에게 농기구 수리하는 기술을 배우라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직업 귀천 타파와 남녀평등 사상을 갖고 있던 이중희는 안동 땅의 계몽(啓蒙)에 힘을 다했던 것입니다. 이중희는 1913년 7월 20일에 임직하여 안동교회 초대 장로이자 안동지역 최초의 장로가 된 김병우 장로의 뒤를 이어, 1915년 5월 7일이 있었던 장로장립을 통해 안동교회 두 번째 시무장로가 되었습니다.  

 

이중희 장로는 안동의 3·1 만세운동에 선구자(先驅者)적 역할을 했습니다. 안동의 3·1 만세운동은 당시 연희전문학교 의학도였던 김재명(김병우 장로의 장남)이 서울에서 발생한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정보를 부친인 김병우 장로에게 전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그 결과 안동교회 담임인 김영옥 목사, 이중희 장로와 교회 밖의 인사들과 안동의 만세운동을 위한 비밀 모의가 진행되었습니다. 참고로 안동 3·1 만세운동 당시 안동교회의 시무장로는 김병우 장로, 이중희 장로, 김정모 장로(1918년 2월 17일) 등 네 명이었습니다. 비밀스럽게 3·1 만세운동을 모의하던 3월 10일, 김영옥 목사, 이중희 장로, 김원진(안동군청 서기), 강대극(동경유학생) 등 4인이 일본경찰에 체포당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일본 경찰은 만세운동에 관한 어떠한 단서도 잡지 못하자 석방시켰지만 이중희 장로는 심문 과정 중 얻은 병으로 인해 석방된 지 한 달 만인 음력 3월 18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때 나이가 60세였습니다. 하지만 비밀모의 사실은 발각되지 않았고, 결국 음력 3월 18일 안동의 대규모 시위가 성공리에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만세운동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옥고(獄苦)를 치렀는데, 안동교회 교인들도 감옥에 갇히는 수난을 겼었습니다. 김병우 장로는 2년, 김익현 조사는 1년, 김재성·김계한·이인홍·황인규·권점필은 6개월씩 각각 복역하였습니다. 김정숙·김병규·이권애 등 여성지도자 3명은 옥고를 각오하고 계명학교 학생 30여 명을 인솔해 만세운동에 참가했지만 일제는 이들 뿐 아니라 여학생 단 한명도 구속시키지 않았습니다.  

 

이중희 가문의 두 번째 장로임직을 받은 사람은 이중희 장로의 장남인 이재삼 이다. 그는 부친 이중희 장로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이중희 가문에 복음의 씨를 뿌린 사람입니다. 어려서부터 새로운 학문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던 이재삼은 김천 장에 갔다가 부해리 선교사가 전해준 전도지를 받아 읽고 부친인 이중희에게 전하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이중희 집안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중희 장로는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귀천이 없고 남녀가 평등하다는 사상을 평생 삶에서 실천한 사람입니다. 더욱이 이중희 장로의 6남매 자녀들은 아버지의 이 사상을 수용하여 자신의 능력에 맞는 직업을 선택했으며, 안동교회 교인으로 충성을 다했습니다.  

 

특히 부친을 따라 안동으로 이사한 이재삼은 열심히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안동교회 80년사에 따르면 그는 안동교회 최초의 장립집사였습니다. 그는 1922년 11월 26일에 집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이재삼과 함께 집사 안수를 받은 사람은 3·1만세운동으로 투옥된 바 있는 황인규입니다. 이재삼 집사는 안동교회 18번째 장로로 1948년 3월 15일에 장립했습니다. 따뜻한 성품을 갖고 있던 그는 안동교회에서 집회가 있을 때 마다 객지에서 온 다른 교회 성도들을 정성을 다해 대접했습니다. 인정이 많아 즐거운 마음으로 손님을 대접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1년에 한 번씩 성소병원 직원들을 초대해 식사도 대접하고 과수원 과일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밭에서 나올 때는 지게에 과실이 가득했는데 마을을 지나오면서 이웃들에게 나눠주기 때문에 빈 지게로 올 때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풍성한 인심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한 해방 후에는 교회의 부흥전도부원으로 헌신해 일제 탄압으로 무너진 경안노회 경내의 교회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그는 찬양대원으로 헌신했으며, 또한 주일학교 부장으로 섬기면서 다음세대들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1950년 1월 8일, 당회는 이재삼 장로를 남장년부장으로 임명했을 정도입니다. 당시 안동교회는 장로 재신임 제도를 두고 있었습니다. 1952년 6월 둘째 주일, 3년 이상 시무한 장로 계속 시무 허락을 위한 공동의회가 열렸을 때 당시 시무장로였던 김재성, 조홍노, 이홍구, 양재옥, 이재삼, 김기한 장로 등은 성도들의 재신임을 얻어 교회를 위해 봉사할 기회가 다시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이재삼 장로는 1956년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던 성탄의 절기인 12월 22일,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천국에 입성했습니다.

 

이중희 가문의 세 번째 장로는 이재삼 장로의 장남인 이인홍입니다. 그는 안동교회 19번째 안수집사로 1963년 11월 17일 집사로 안수를 받았으며, 1년이 지난 1964년 12월 13일에 장로장립을 받음으로써 안동교회의 27번째 장로가 되었습니다. 이인홍 장로는 김천에서 출생했는데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노방 전도하던 부해리 선교사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역시 조부 이중희 장로처럼 부친인 이재삼 장로가 김천 시장에 갔다가 전도지를 받아 가지고 온 것이 기회가 되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안동의 3·1 만세운동 당시 19세였던 이인홍은 임동에 위치한 협동학교 학생이면서 안동교회 청년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협동학교는 안동 내앞(川前) 소재 안동독립운동기념관 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는 안동에서 3·1 만세운동이 비밀스럽게 진행될 때 수십 명의 동료 학생들과 내통하여 안동 시내 여관에 모이게 했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6개월 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또한 동경지진이 발생한 해인 1923년 대구를 잠시 방문했던 이인홍은 대구 달성공원에서 4명의 친구들과 지진 이야기 중에 일본 천황이 죽지 않아 유감이라고 말한 것을 들은 어떤 사람이 경찰에 신고하여 불경죄로 고문(拷問)을 받고 20일 동안 구류를 살기도 했을 정도로 투철한 국가관을 가진 애국자였습니다.  

 

이인홍도 조부와 부친의 가르침인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생각으로 구두를 만드는 제화기술자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작은 도시인 안동에서 제화기술자로 생활하기에는 너무도 어려워 직장을 찾아 일본 동경으로 가게 됩니다. 동경의 사진 강습소에서 사진기술을 배워 귀국한 그는 안동역 앞에 금강사진관을 개업해 운영했습니다. 당시에는 사진을 찍으면 혼이 빠진다느니, 세 명이 사진을 찍으면 가운데 사람이 먼저 죽는다는 등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소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사진기술은 점차 지역에서 인정을 받게 되어 주변 지역까지 가서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6·25 전쟁 중에 사진관이 전소되는 바람에 보관 중이던 소중한 필름이 모두 불에 타 버렸습니다.  

 

6·25 전쟁이 끝난 후에는 사진관을 넷째 동생에게 인계해주고 이인홍 장로는 성광칼라 현상소를 운영했습니다. 그는 수입이 생기면 시내 금곡동 서당골 일대에 땅을 매입하여 과수원을 조성했습니다. 과수원에서 과수를 따서 집으로 오다가 동네 아이들을 만나면 아버지 이재삼 장로처럼 과일을 나눠주어 빈광주리로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구입한 금곡동 일대의 땅에 가난한 사람들이 집을 짓고 거주하도록 했으며, 나중에는 20여 가족의 주민들에게 헐값으로 그 땅을 불하해 줄 정도로 가난한 이웃의 벗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연약한 교인들이나 지역 주민들을 돕는 일에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사용했습니다. 또한 이 장로의 부인인 장경영 권사는 14세부터 79세 까지 무려 65년 동안 안동교회 주일학교 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이처럼 이 장로 부부는 안팎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산 믿음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교단 충회에서 장로의 정년을 70세로 정하자 이인홍 장로는 퇴임 이후 자유롭게 할 일을 찾았습니다. 그러다가 생각한 것이 장학금이었습니다. 이인홍 장로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해야 할 일 중에 하나가 장학금을 통해 다음세대를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장학금을 적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17년 간 푼푼히 모은 100,200원(현재의 화폐가치로 10,200,000원)을 교회 장학기금으로 헌금했습니다. 이 뜻에 동참하는 교인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면서 안동교회 장학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이인홍 장로의 장학헌금이 종자돈이 된 안동교회 장학회는 수년 전부터 매년 4,000만원에 달하는 장학금을 교내·외 학생들에게 지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안동교회 교육관 건축위원과 안동 중앙신용협동조합 초대 이사 등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 특히 그는 1980년 4월 18일, 안동댐 경내에 안동군·시 독립기념비를 세우기로 마음을 먹고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안동댐에 광복기념비를 건립한 바 있으며, 또한 독립사 출판사업회를 조직하여 독립사안동판이라는 책자도 출간하는 등 지역사회의 중심인물이었습니다. 1992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인홍 장로는 1993년 3월 1일, 숭고한 애국정신으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가 인정되어 대통령 표창을 받았습니다.  

 

이중희 장로 가문의 네 번째 장로는 이인홍 장로의 아들인 이정일 장로입니다. 그는 안동교회 46번째 안수집사로 1979년 5월 13일 집사로 안수를 받았으며, 1983년 5월 8일 장로 장립을 받음으로써 안동교회 51번째 장로가 되었습니다. 이정일 장로는 3남 4녀 중 둘째 아들입니다. 그는 7남매 중 유일하게 안동에 남아 안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증조부의 신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정일 장로는 안동교회 제직회 서기, 재정부장, 찬양대 대장, 특별위원장과 경안노회 평준화위원장 등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일평생 헌신해왔습니다. 특히 이 장로는 60년 가까이 동안 안동교회 찬양대를 지켜온 산증인입니다. 현재 그 만큼 오랜 세월동안 안동교회 찬양대의 자리를 지켜온 사람은 없습니다. 더욱이 20여 년 전에 창단된 안동장로합창단에서 쉬지 않고 계속해서 오늘까지 봉사하고 있습니다. 비록 정년(停年)을 넘겨 은퇴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그는 이 합창단의 최고령자로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입니다. 이처럼 이 장로님은 성실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섬김의 자리를 쉽게 떠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통해 수십 년 동안 똑 같은 하나님의 일을 쉽게 중단하지 못하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에게 안동을 떠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안동교회를 섬긴 결과, 이정일 장로도 모르는 사이에 누구도 근접하지 못할 한 교회 4대 직계장로라는 거룩한 역사가 기록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장로의 부인인 김선애 권사는 1908년 설립된 풍기 성내교회를 개척한 초대교인의 후손입니다. 그의 조부는 장로로 교회를 섬겼으며, 안동교회 원로장로인 김학준 장로는 그의 큰 아버지입니다. 이정일 장로 가문이나 부인 김선애 권사의 가정은 모두 경북북부지방 초대 교회들의 처음 교인일 뿐 아니라 후대도 귀한 믿음을 이어가고 있는 거룩한 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가족 등반을 하는데 이것은 가족의 유대감을 높이고 조상들의 믿음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기회가 되고 대를 이어 신앙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이 장로는 말합니다. 이 장로의 가정이 계대신앙(繼代信仰)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정일 장로는 자신이 4대째 장로 가정임을 자랑하기 전에 자신의 행동이 선조들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않을 까 하는 마음으로 늘 말과 행동에 조심하게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늘 겸손한 마음으로, 또한 지금까지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중희 장로 후손들은 오늘도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신들이 살고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역과 주의 몸인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혹은 장로로, 혹은 권사로, 혹은 집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중희 장로 가문은 한국과 미국의 교회에서 믿음의 선조들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을 최우선으로 삼고 오늘도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증조부 이중희 장로, 조부 이재삼 장로, 그리고 아버지 이인홍 장로에 이어 4대째 안동교회에서 시무장로로 교회를 섬긴 이정일 장로의 말입니다. “저희 가문에서 안동교회에서만 4대째 시무장로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교인들의 사랑 덕분입니다.” 한 교회에서 직계로 4대 장로로 임직한 거룩한 역사는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교회를 위한 헌신과 섬김 없이도 결코 발생할 수 없는 거룩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장로는 교회 앞에 사랑을 받을 뿐 아니라 인정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일교회에서 4대 직계 장로를 배출한 이중희 장로 가문은 하나님과 성도들에게 모두 사랑을 받은 부럽고 복된 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8년 10월 26일

김승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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