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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북부지역 선교초기 기독교 건축물
배위량(裵偉良, 베어드, William M. Baird)은 복음의 미답지인 대구와 경북지역에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선교사입니다. 미국 북장로교 파송선교사인 그는 1891년 내한(來韓)하여 부산선교부에 부임했습니다. 그는 1892년 경남지역 순회전도를 마치고, 이듬해인 1893년 4월 17일 부산을 출발하여 30여 일 동안 대구와 경북지역을 방문했습니다. 특히 안동, 예천, 의성 등을 포함하는 경북북부지역에는 단 한번밖에 방문하지 않았지만 그가 이 지역에 끼친 영향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지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남신학대학교 배재욱 교수는 배위량 선교사의 대구·경북지방 순회전도 기간이 매우 짧아 대구·경북지방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대구와 영남 내륙 지방에 거룩한 영향을 끼쳤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배위량의 제2차 순회전도 여행은 그리스도교 문화와 선진 서양 교육과 과학 등이 영남지역에 이식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영남신학대학교 이혜정 교수도 배위량의 대구·경북지역 방문의 의의를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로 평가합니다: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겪고 있던 조선 후기 사회에서 선교사업은 정부의 손이 미치지 않은 공공역역인 교육과 의료사업을 전개하면서 대중에게 빠르게 보급되었다. 더욱이 한글 친화정책과 여성교육 정책, 엘리트 중심이 아니라 대중 중심의 선교정책은 대중적인 파급력을 높였다.”
배위량 선교사가 경북북부지역을 방문해 성경을 판매하며 전한 복음은 여러 분야에 영향을 주었을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학자들은 배위량 선교사의 순회전도 여정(Route)과 그의 방문 이후 경북북부지역의 근대화가 의료, 교육, 복지, 건축, 음악과 생활 등의 여러 부문에서 발생한 것으로 평가합니다. 특히 선교사 사택, 안동성소병원과 안동교회 예배당 등의 기독교 건축물은 경북북부지역 교회 뿐 아니라 일반 건축물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따라서 필자는 경북북부지역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1910년대부터 1930년대에 준공된 대표적인 기독교 건축물을 이 글에게 간단히 소개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 건축물은 1909년 확정된 안동선교부에 주재한 선교사 사택입니다. 1908년 안동에 도착한 대구선교부의 부해리(傅海利, 브루엔, Henry Munro Bruen) 선교사와 사우대(史佑大, 쏘텔, Chase Cranford Sawtell) 선교사는 앞으로 안동에서 거주할 선교사들이 머물 임시주택을 구입했습니다. 그러나 한옥주택은 선교사들이 거처하기에 불편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기거할 영구주택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안동교회 80년사에 따르면 안동선교부의 주임 선교사였던 오월번(吳越璠, 웰본, Arthur Garner Welbon) 선교사는 사택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본격적으로 그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오월번 선교사는 우선 안동선교부 부지로 서당골로 불리는 금곡동 북쪽 동산을 구입했습니다. 안동에 체류하고 있던 장인차(張仁車, 존슨, Woodbridge O. Johnson) 의료선교사가 오월번 선교사에게 1910년 11월 26일 쓴 편지에 따르면 낙동강이 보이는 동산기슭 앞에 100 야드 정도의 새로운 선교센터 부지가 잘 부서진 화강암 토질로 배수도 매우 좋았다고 합니다. 오월번 선교사의 손녀 에비(Priscilla Welbon Ewy)여사의 글에 따르면 안동선교부는 1910년 10월 24일 지부를 세울 대지를 구획하고, 땅을 고르기(grading) 시작했음을 밝힙니다.
대지 정지작업이 끝난 후 1911년 여름부터 두 채의 선교사 사택을 건축하기 시작했는데, 한 채는 완전히 준공이 되지 않은 채 1911년 12월 27일 오월번 선교사 가족이 입주했으며, 다른 한 채는 1912년 5월에 완공되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 사택 건축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오월번 선교사는 선교사 주택에 필요한 목재를 구하기 위해 낙동강 상류로 80리 길을 3일 동안 집을 떠나야 했고, 적지 않은 자재들은 미국과 일본에서 수입해야 했으며, 건축을 위해 25명이나 되는 많은 일꾼을 고용했지만 작업은 매우 더디게 진행되어 예정보다 늦게 준공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사택을 건축하면서 심적, 물적 어려움에 직면해야 했지만 3년 만에 마침내 4동의 사택을 준공하게 됩니다.
1913년에 두 동의 사택을 더 건축했고, 이 곳에 권찬영(權燦永, 크로더스, John Young Crothers) 선교사와 심의도(沈義道, 스미스, Roy Kenneth Smith)선교사 부부가 입주했습니다. 참고로 심의도 선교사는 안동성소병원의 제2대 원장으로 부임한 의료 선교사이다. 이처럼 토지 정지작업을 시작한 1910년부터 1913년까지 네 채의 선교사 사택이 완공되었습니다. 오늘날까지 보존된 사진에는 안동선교부 기지(基地)에 4채의 사택이 준공된 후 포프라(poplar) 나무와 그 사이에 있는 도로를 볼 수 있는데, 이 길은 현재 우편에는 성소병원과 좌편에는 경안고등학교를 끼고 북쪽으로 올라가는 금곡동 도로입니다.
특히 선교사 사택은 한옥이 아니라 철저히 선교사들의 생활에 맞춘 서양식 건물이었습니다. 화장실도 재래식 화장실이 아니라 수세식 화장실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상수도 시설이 없어서 지하수를 정수하여 식수로 사용했습니다. 또한 마당에 커다란 물탱크를 만들어 빗물을 받아 그 물을 화장실과 정원에 활용했습니다. 건물의 난방은 방안에 화덕을 설치했고, 건물의 벽이 두껍기 때문에 튼튼하고 방풍, 방한과 방음도 우수했습니다. 따라서 안동지역 주민들은 처음으로 보는 서양식 주택에 큰 관심과 호기심을 갖고 선교동산을 찾았을 것입니다. 또한 사택에 구비된 여러 시설 등은 알게 모르게 이 지역의 건축 근대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1911년부터 시작되어 1913년까지 계속된 건축 결과 안동선교부 기지 내에 네 동의 선교사 사택이 지어졌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모두 철거되어 남아 있는 사진으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지동산에 세워진 네 채의 선교사 사택과 안동선교부 기지는 6.25 전쟁 가운데서도 살아남았지만 다음세대 교육을 위해 희생되어야 했습니다. 1954년 경안고등학교가 설립되면서 피치 못하게 선교기지 내 선교사 사택을 철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선교사 사택은 경안고등학교를 위해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4채의 선교사 사택 가운데 한 채라도 보존이 되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에는 오늘날과 다르게 역사의식도 부족했을 뿐 아니라 중등학교 설립이 더 큰 시대적 과제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선교사 사택과 선교부 기지는 1950년 대 기독교 교육기관인 경안고등학교를 낳았으며, 그 후에 경안중학교, 경안여자중학교, 경안여자고등학교를 낳은 모체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건축물은 1909년 10월 1일 개원한 이후 처음으로 건축하여 1914년에 준공된 안동성소병원 건물입니다. 뉴욕의 쇼플러(S. F. Schauffler)가 후원한 1만 달러로 금곡동 177번지에 가로 21.3미터 세로 10.7미터, 3층 병원 건축이 1913년에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1만 달러는 오늘날 수백억에 해당될 정도로 큰 액수입니다. 안동성소병원 건물은 철재와 철빔으로 건물의 뼈대를 세웠고, 건물의 벽은 2층과 3층은 붉은 조적으로, 1층은 회색 조적으로 마감되었는데, 1층에 위치한 입구는 흰색이 칠해진 나무로 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공사기간이 1차 세계대전과 겹치면서 건축에 사용될 목재, 유리 등 자재와 인부 등을 다른 지방, 심지어는 외국에서 수입해야했기 때문에 자재조달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공사 지연은 다반사였다고 합니다.
이런 열악한 건축 환경으로 인해 우여곡절 끝에 안동성소병원은 1914년 11월 14일 준공되었는데, 병원 이름은 쇼플러의 부친을 기념하여 ‘코넬리우스 베이커 기념병원’(Cornelieus Baker Memorial Hospital)이었습니다.이때부터 안동성소병원은 경북북부지역의 공식 병원이 되었습니다. 현재 안동교회 터의 선교사 임시 사택에서 처음으로 환자들을 진료를 하다가 이 병원건물 준공과 함께 금곡동 177번지에 주소를 둔 신축 병원에서 환자들을 진료하고 치료하기 시작했습니다. 안동성소병원은 당시 초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있었는데, 창문에 커튼이 쳐지고, 방충망도 설치되었습니다. 채광과 통풍을 위해 창문을 가장 적당한 자리에 위치하게 했는데, 당시 사진을 보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환자 대기실, 약국, 실험실도 있었고, 여성병동과 주방, 저장실, 벽장, 기계실 등도 갖추었습니다. 저장실과 벽장에는 수건과 시트와 베개와 환자복, 그리고 다른 비품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병원이 완공된 후 선교보고에 의하면 “죽은 뼈가 제거되고, 빠진 턱과 골절된 부분이 맞춰지고, 상한 눈이 지탱되고, 화상이 치료되고, 피부가 이식되고, 종양이 제거되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안동성소병원은 경북북부지역 주민들의 질병 치료에 놀라움 그 이상이었습니다. 1914년부터 안동성소병원은 준공과 함께 육(肉)의 질병을 치료할 뿐 아니라 동시에 영(靈)도 치료하여 구령(救靈)의 도구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세 번째 건물은 안동교회 2층 돌집 예배당입니다. 돌집 예배당으로 부르는 이유는 8,000여개의 화강암을 쌓아 건축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일본에서 건축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던 보리스(William Merrill Vories) 선교사는 안동선교부의 권찬영 선교사의 부탁을 받고 1931년과 1933년에 두 차례에 걸쳐 안동교회 예배당을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두 개의 설교 도면은 일본의 대학교 도서관에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습니다. 1931년 설계 도면은 지금 건물 모습으로 장방형 2층 건물인데 반해, 1933년에 설계한 두 번째 도면은 십자가 형태의 단층 건물이었습니다. 결정 과정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건축을 시작할 여건이 충족된 이후인 1936년 초여름인 6월, 첫 번째 설교 도면대로 예배당 신축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석조 예배당은 어린이·어른과 남·여 노·소를 포함한 전 교인들, 안동선교부와 선교사들, 노회 경내의 교회 등 모두가 합력하여 1937년 4월 5일에 준공되었습니다. 공사 기간은 삼백 삼십 여일이었고, 공사비 총액은 이만 이천 원이 넘는 거액이었으며, 기초면적 160평의 2층 건물로 총건평 320평 규모로 당시에는 대형 예배당이었습니다. 특히 상량식(上梁式) 할 때 피로연을 했을 정도로 돌집예배당은 안동교회 성도들 뿐 아니라 건축에 참여한 모두의 기쁨이었고 감사의 제목이었습니다. 온 교우의 피와 땀으로 건축된 예배당이 준공되기 까지 건축기간 동안 작은 부상(負傷)이나 상처는 없었는데,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사실 돌집 예배당은 독특한 형식과 외모를 가지고 있는데, 유심히 바라보지 않으면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예배당의 외관 지붕 위에는 작은 3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교회 건축학자들은 교회 지붕 위의 3개의 십자가는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또한 지붕 가장 높은 중앙의 십자가와 양쪽 십자가를 잇는 돌계단은 좌우에 각각 12개가 있습니다. 12라는 수는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뜻하며, 신약에서 예수님의 제자 수를 의미합니다. 양쪽의 12개 계단을 합한 24계단은 24장로를 의미하며, 24장로는 구약의 하나님 백성과 신약의 교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안동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인 동시에 안동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건물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안동교회 예배당 보다 더 크고 무거운 건물이 당시 안동에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돌집 예배당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膾炙)되었습니다. 거대한 2층 돌집 예배당은 당시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나라 석공 가운데는 화강암을 쌓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서울에 소재하고 있는 중국 건축회사가 공사를 담당하였고, 화강암을 쌓은 사람도 중국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건축이 끝나자 장안(長安) 뿐 아니라 안동 근교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안동의 명물(名物)로 예배당을 보기 위해 여기저기서 몰려들었습니다. 90세에 가까운 경안노회 한 공로목사님의 기억에 따르면 신축된 돌집 예배당을 보기 위해 풍산에서 경북선 열차를 타고 안동에 왔을 정도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입니다.
경북선은 1924년 10월 1일 김천∼상주 사이 36㎞의 조선철도회사선이 개통된 것을 시작으로 하여, 같은 해 12월 25일에 상주∼점촌 사이 23.8㎞가 개통되었고, 이어 1928년 11월 1일에는 점촌∼예천 사이 25.5㎞가 완공되어 영업을 개시하였습니다. 3년 뒤인 1931년 10월 15일에는 예천∼안동 사이 32.8㎞가 개통되어 총 연장이 118.1㎞에 이르렀다가, 1940년에 조선철도회사로부터 경북선 철도를 매수한 일본은 전쟁 말기의 군수 물자 조달에 쫓겨 1943년에서 1944년까지 점촌∼안동 사이의 58.3㎞를 철거했습니다. 안동 인근 지역에 있는 사람들은 안동교회 돌집 예배당을 보기 위해 이 경북선을 사용했습니다.
안동에서 김천까지 연결하는 경북선이 거쳐 가는 도시들에는 이미 교회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1903년에 세워진 김천 황금동교회, 1900년에 시작된 상주교회, 1900년에 설립된 금곡교회, 1909년에 세워진 점촌침례교회 등 경상북도 서편과 북편의 김천, 상주, 점촌, 예천 등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교회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이 지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경북선을 타고 신축된 안동교회 예배당을 보기 위해 안동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열차 역(驛)이 있던 경안노회 경내의 개평, 가동, 예천, 용궁, 고평, 호명, 명동 등 뿐 아니라 상주, 함창, 점촌, 산양 등에 거주하던 그리스도인들도 신축된 안동교회 돌집 예배당을 보기 위해 안동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안동교회 석조 예배당은 인근 교회 예배당 건축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배위량 선교사의 대구·경북지방 순회전도 기간은 매우 짧았지만 이 지역에 끼친 영향은 결코 무시 할 수 없습니다. 그의 방문 이후 경북북부지역의 의료, 교육, 복지, 건축, 음악과 생활 등 여러 부분에서 크고 작은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191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건축된 대표적인 기독교 건축물인 4동의 선교사 사택들, 3층 붉은 벽돌 안동성소병원과 안동교회 2층 돌집 예배당 등의 건축물은 안동 지역사회의 건축물에 어떤 모양이든지 선한 영향을 주었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의 예배당과 여러 건물들은 선교사들이 건축한 근대 기독교 건축물에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저 감사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또한 경북북부지역 선교초기 기독교 건축물들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후대에 선한 영향을 줄 뿐 아니라 남겨줄 유산들을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2026년 5월 5일
김승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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