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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토르(viator), 길 위의 인생
이태리의 밀라노 대성당에는 세 가지 아치로 된 문이 있다고 합니다. 장미꽃이 새겨져 있는 첫째 문에는 “모든 즐거움은 잠깐이다”라는 글귀가 있으며, 둘째 문에는 십자가가 새겨졌는데 “모든 고통도 잠깐이다”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고, 마지막 셋째 문에는 “오직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이다”라는 글이 쓰여 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장미를 좋아합니다. 또한 장미꽃은 참 화려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장미꽃처럼 화려하게 피었다 지는 꽃과 같고, 아침에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꽃으로 비유하십니다. 120년 동안 살다가 죽음을 맞이한 모세는 “그들은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시 90:5~6)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풀과 같이 시들어 지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하늘나라에 비하면 우리 인생이 너무도 짧기 때문에 누리는 즐거움도 잠깐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누리는 즐거움도 잠깐이지만 동시에 고통도 잠시입니다. 전광석화같이 지나갑니다. 십자가는 주전 6세기경부터 주후 4세기까지 가장 고통스럽고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도구였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참을 수 없는 고통과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도 하나님의 시간 계산법에 따르면 잠깐입니다. 모세는 인생을 “밤의 한 순간 같다”(시 90:4)고 회상했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일시적인 이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하며 바로 그 곳은 천국입니다. 끝이 없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가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잠시 사는 곳으로 인정하지 않고 천년만년 산다고 생각하면 영생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종착역에 관한 관심을 갖지 않고, 또한 준비도 하지 않고 있다가 어느 날 예고 없이 찾아온 죽음을 마주하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은 날마다 죽음을 의식하며 살아야 하며,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종말론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종말은 끝이란 뜻으로 이 세상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을 암시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종말론적 삶은 이 세상에서의 삶은 언젠가 끝난다는 것을 의식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말은 좁게는 개인의 죽음, 넓게는 우주의 멸망을 뜻합니다. 종말은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과 이 세상도 언젠가는 끝이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종말이 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슬기로운 사람이며, 이들은 날마다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며 삽니다. 이 세상을 영원히 머물 곳으로 생각하지 않고, 가야할 곳이 있음을 기억하고 이 땅에서 나그네 의식을 갖고 사는 사람은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현재 안동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순수 고향이 안동인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옆 동네인 의성, 예천, 영주, 봉화, 청송, 영양 빼고 이곳 안동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여 이곳에서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곳에서 결혼하고, 이곳에서 가정을 이루어 오늘에 이른 사람들 말입니다. 안동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은 안동시민의 몇 %나 될까요? 아주 많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필자는 무려 32년 전에 이곳에 왔습니다. 잠시 있다가 떠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나그네로 있다가 고향인 서울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안동교회에서 전임전도사 2년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미국에 가서 공부할 계획이었으니까요.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면 다시 안동으로 올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안동에서의 삶은 목회생활의 일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땅에서 오래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길어야 2년 반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유학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기 전 까지 3년 더, 총 5년 반을 안동에 머물렀습니다. 1997년 6월 둘째 주일 교회 앞에 사임 인사를 하고 안동을 떠나 미국으로 출국했으니까요. 안동을 떠난 지 6년 수개월이 지난 2003년 10월, 안동으로 다시 돌아온 후에도 벌써 21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필자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초·중·고·대학교 등 모든 공부를 다 마쳤습니다. 서울에서 산 기간은 31년 수개월이 됩니다. 그러나 60대 중반에 이른 지금은 안동이 고향과 같이 생각됩니다. 일이 있어 가끔 서울에 올라가면 필자가 태어나 30년 넘게 생활한 서울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아침에 안동을 떠나 타지에 갔다가 남안동 톨게이트에서 내려 한 밤 중에 수상동 안동병원을 지나 안동대교를 건널 때 불이 켜진 북쪽의 아파트를 보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서안동 톨게이트에서 내려 학가산 온천을 거쳐 경안중학교와 경안여자고등학교를 지나 송현동 오거리에 도착하면 집에 다 도착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편한 마음이 찾아옵니다. 32년 전 안동에 처음 내려올 때는 불편한 객지였지만, 이제는 안정적이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고향 같은 곳이 되었습니다. 육적으로는 안동이 고향과 같은 땅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여전히 이곳 안동은 나그네의 삶을 살아야 하는 땅입니다. 안동은 최종 목적지인 하늘나라에 가기 전까지 머물러 있어야 하는 일시적인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안동은 필자가 지나가야 하는 땅이며, 필자는 안동 땅을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 ‘비아토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압니다.
중세 시대의 수도사들은 성도들을 ‘비아토르’라고 불렀습니다. ‘비아토르’는 라틴어로 '길 위의 사람' 또는 '길 위의 인생‘이라는 의미로 나그네를 가르킵니다. 나그네는 자기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묵으면서 꽤 먼 길을 가거나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떠도는 여행자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나그네인 ‘비아토르’는 ‘세상에 영원히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영원한 곳이 아닙니다. 영원히 머물고 싶어도 지나가야만 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나그네 의식을 가지고 하늘나라를 목적지로 정하고 열심히 걸어야 합니다. 성경적으로 나그네는 이 세상에 눈을 두는 사람이 아니라 위, 즉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주목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4:18).
나그네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그네 의식은 세상적 욕심과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합니다. 세상은 영원히 머무는 곳이 아니라 지나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나그네는 이 땅에서 성실하게 살긴 하지만 현재에 매달리거나 미련을 두지는 않습니다. 나그네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하늘나라를 사모합니다. 하루하루의 모든 일이 내일을 위한 준비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늘나라를 향한 순례의 길을 묵묵히 걷습니다. 순례자 의식을 가지고 있는 나그네, ‘비아토르’는 땅의 소리, 세상의 소리가 아니라 하늘의 소리에 민감합니다. 세상의 바람이 아니라 하늘의 뜻에 민감합니다. 육의 소리가 아니라 영의 소리에 이끌려 삽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이 영원히 머물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침내 하늘나라에 입성할 수 있습니다.
지난 11월 한 달 동안 7명의 성도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11월 첫 주는 한분, 둘째 주는 세분, 셋째 주는 한분, 그리고 넷째 주는 두 분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교회는 매주 장례예식을 치러야 했습니다. 이 가운데는 우리 교회에 출석하다가 하늘나라에 간 성도도 있고,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의 가족이 세상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일곱 분의 성도 가운데 세분은 남성이고, 네분은 여성입니다. 대부분 연세가 든 분으로 노쇠하거나 지병이 있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한 분은 89세로 천국에 가셨습니다. 이 분은 40여 년 전에 우리 교회에 출석하여 세례까지 받았는데, 지난 5월에 다시 교회에 나오기 전까지 교회와 멀리 있었습니다. 교회의 한 권사님이 타지에 살던 이 분의 딸에게 아버지의 교회 출석을 권함으로써 이 분은 다시 출석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특히 아버지와 지인인 은퇴하신 목사님이 인도했는데, 주일마다 은퇴 목사님과 딸은 이 분과 동행했습니다. 은퇴 목사님은 휠체어를 타고 본당 예배당에 온 이 분 옆에서 늘 예배를 드렸습니다. 병세가 악화되어 몇 주 동안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분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 머는 기간은 40년을 넘어 50년에 가깝습니다. 다시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린 기간은 채 6개월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을 다시 찾았다는 것입니다. 비록 숨을 거두기 전 수 주일 동안은 교회에 나오지 못했지만 그래도 40여 년 만에 하나님 앞에 나와 오랜 세월 동안 중단되었던 예배를 회복한 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다가 이 세상을 떠났다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끔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 이 분의 죽음을 보면서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은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은 결국 하나님께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분의 죽음이 가족을 구원하는 씨앗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장례예식을 마치고 나서 이 분의 부인이 주일예배에 참석했기 때문입니다. 이 분은 죽으면서 가족을 구원하는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사나 죽으나,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음을 다시 깨닫게 되는 거룩한 죽음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를 쓰면서 모두(冒頭)에 수신자를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라고 기록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흩어진 나그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나그네인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영원히 살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잠깐 머물다가 반드시 떠나야 하는 임시 거주지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은 예수님이 친히 예비해 두신 천국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야 합니다. 외국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이 세상이 좋아도, 이 세상에서 잘 살아도 영원히 머무를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고 있어도 떠나야 합니다. 나그네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에 갈 준비를 합니다. 해야 합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와 윌리엄 윌리몬(William Willimon)은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 거주하고 있지만 이 세상에 완전히 정착해 안주하지 않으며, 이 세상의 현실에 영향을 받고 있으나 현실과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 이 세상의 타락에 저항하지만 하늘의 진리로 혁명을 꿈꿔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비아토르’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길 위에 서 있는 사람, 즉 세상을 지나가는 나그네입니다. 나그네 의식을 가진 사람은 천국을 준비하며 삽니다. 오늘 하나님이 불러 가실 수도 있다는 종말론적 신앙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등불을 밝힐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오늘도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또한 호흡할 수 있을 동안은 물론이고, 죽은 후에도 영생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복음을 사랑하고 복음에 미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Ego sum viator. 나는 나그네입니다. 나는 천국을 향해 이곳저곳을 지나가는 여행자입니다. 내가 비아토르, 세상을 지나가는 나그네임을 분명히 압니다. 날마다 비아토르 의식을 갖고 천국을 향해 걸어갑시다.
2024년 12월 14일
김승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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